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 장재형목사

1.  고린도후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

고린도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의 내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편지로 알려져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갈등과 눈물을 담아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그 편지는 현재 우리 손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안에 담긴 바울의 표현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 교회 상황뿐 아니라 바울이 겪은 환난과 고통, 그리고 그 가운데 경험한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베소에서 겪은 극심한 박해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에 이른 바울은, 자신이 인간적으로 전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고린도후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이 메시지가 지닌 의의는 과거 고린도 교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애쓴 장면들, 교회 내부의 분열과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단호히 대처한 장면들, 그리고 환난 중에도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간 모습은 오늘의 교회가 경험하는 현실과 깊이 맞닿아 있다. 교회 안팎에서 물질주의, 세속화, 그리고 교리를 흐리는 온갖 도전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였고,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오직 부활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라는 단 하나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의 사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형목사는 국내외에서 교회 개척, 미디어 사역, 선교·교육 활동 등을 펼쳐 왔으며, 그 사역 현장에서 여러 형태의 도전을 마주했다. 시대가 달라졌기에 당시 고린도 교회가 겪은 문제와 현대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가 세부 양상에서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 문명권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온갖 문화적 혼합주의와 세속적 유혹이 교회에 들어와 분열을 야기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물질주의와 세속 가치, 그리고 온갖 미디어를 통해 들어오는 왜곡된 정보로 인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그럴수록 지도자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거짓 교사나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교회를 붙들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며, 행위나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현대 교회의 지도자 또한 오직 복음 자체를 철저히 지키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복음의 순수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린도후서의 문제의식과 만난다. 교회가 외적으로 번창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더라도, 복음 자체가 희미해지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울이 편지 곳곳에서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면서 “나는 약한 가운데서 오히려 강하다”고 천명한 것은, 세상적 기준에 의하면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언변이나 세상적 성공을 사도의 증거로 삼으려 했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고난과 약함을 통해 진정한 사도직의 표지를 증명해 냈다. 이 패턴은 현대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준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아무리 크게 확장되어도, 지도자가 세상적 성공만을 자랑한다면 교회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고,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교회를 온전히 믿음 위에 세울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 권위가 서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몸소 보여 준 셈이다.

특히 바울이 에베소와 마게도냐, 그리고 고린도를 오가며 겪었던 환난은 그의 사도직을 무너뜨리려는 세력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고린도후서에는 그 환난이 얼마나 크고 심각했는지, 그로 인해 바울이 살 소망조차 끊어졌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 바울은 한계를 느꼈고, 자기를 의뢰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는 현대 교회와 성도, 그리고 목회 지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원리다. 목회나 선교 사역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 인간적 지혜와 수단에만 의존한다면 쉽게 한계에 부딪친다. 이때야말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실해지고, 그 믿음을 통해 복음 사역이 새로운 확장을 맞이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의 수많은 고난을 길게 나열하면서도,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께 붙들린 자임을 증명하는 도구였다고 말한다. 사도직의 권위를 저마다 주장하던 거짓 교사들은 화려한 언변이나 세속적 배경을 자랑했지만, 바울의 진정한 사도적 표시는 오히려 “고난과 환난 속에서 버림받지 않고 주님의 능력 안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장재형목사가 국내외에서 사역해 온 여러 과정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 언어, 재정, 행정적 제약, 심지어 이단이나 극단적 비판자의 공격 등 다양한 형태의 도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교육, 미디어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바울이 보여 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함을 붙드는” 태도와 닮은 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여러 목회자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사역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고린도후서가 말하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의 동일한 체험이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에서도 반복된다는 뜻이다. 한편, 고린도후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가 “교회 내 갈등 해결”과 “거짓 교사 분별”인데, 이것도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교회도 갈등 없이 순탄할 수는 없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신학적·정치적·관계적 이슈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갈등을 맞닥뜨렸을 때, 바울이 보여 준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교리를 왜곡하거나 복음을 훼손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한다. 둘째, 교회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호소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해야 교회가 회복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넘치는 사랑을 갖고 있는지 알게 하려 함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책망만으로 상대방을 조각내고 버리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되 그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목회 현장이나 여러 매체에서 갈등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복음에 해가 되거나, 교회 공동체를 심각하게 무너뜨리는 가르침이라면 결코 묵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눈물의 편지”가 보여 주듯,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이 사라지면 안 된다. 책망은 결국 교회를 회복하고 세우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고린도후서 전편을 관통한다.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 드러낸 역사적·신학적 배경과 핵심 메시지는, 오늘날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 더 나아가 모든 성도에게 여전히 유효한 원리를 제공한다. 당시 고린도는 상업이 발달하고 우상 숭배 문화가 만연했으며, 도덕적으로도 문란한 풍조가 깃들어 있었다. 교회 안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거나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 분열을 일으켰다. 이에 바울은 편지로만 대응한 게 아니라, 디모데나 디도를 파송하고, 직접 방문을 계획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고난과 눈물을 가감 없이 교회에 전했다. 그 처절한 노력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교회를 바로 세우고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아무리 사랑이 넘친다 해도 복음의 본질이 흔들리면 무너지고, 아무리 교리가 단단하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거친 방식으로 사람들을 몰아내는 부작용을 낳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 두 가지를 함께 지켜 낸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낸 고린도전서를 통해 교회를 먼저 권면했다가, “눈물의 편지”를 보낸 뒤 마게도냐 지방에서 고린도후서를 작성했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이지만, 어디서 편지를 썼든 중요한 것은 그의 심정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즉 에베소에서의 큰 박해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우상 숭배 세력과의 충돌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면서 겪은 영적 싸움이 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런데 그 지점이야말로 하나님이 바울에게 “네가 나를 의지하면 내가 너를 건져 낼 것이고, 더 큰 일에 쓰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다시금 위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교회 내 죄와 분열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린도교회 일부가 회개하고 태도를 고치기 시작한다는 희소식을 디도를 통해 듣게 되면서, 바울은 한편으로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 남아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고를 보낸다. 이처럼 눈물과 기쁨, 환난과 위로, 약함과 강함이 교차하는 것이 고린도후서가 가진 매력이며, 동시에 거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이 녹아 있다.

이 신학은 결국 “부활 신앙”에 근거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 말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능력이나 계획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죽음까지도 뒤엎으실 수 있는 능력자라는 뜻이다. 자기 능력이나 지혜를 아무리 내세워 봐도, 극심한 위기 앞에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일하시면,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세련된 언변을 가졌다 해도, 교회가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뢰한다”라는 믿음을 놓쳐 버리면, 잠깐은 성장하는 듯 보여도 위기가 닥쳤을 때 휘청거리고 만다. 반대로 성장이나 외적 성공이 더뎌 보인다 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장재형목사가 국내외에서 펼쳐 온 사역, 특히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 개척이나 다양한 미디어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부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다룬 예루살렘 구제 헌금 이야기도 현대 교회에 여전히 유효한 주제다. 이는 재정 문제나 헌금의 기술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 간 연대와 사랑, 영적 교제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보여 주는 모범 사례다. 고린도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를 보고 도전을 받고, 다시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며 하나의 그리스도 몸을 이룬다는 이 그림은, 오늘날에도 지역과 국가, 교단을 초월해 교회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국가에 걸쳐 교회들을 세우고,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사역한다면, 그 관계가 단순히 ‘조직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교회 연대’를 구현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 즉, 재정적·인적 자원을 서로 보충해 주고, 약한 교회를 세워 주며, 환난당한 교회를collectively 돕는 것 자체가 복음이 지닌 힘을 실제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결국 고린도후서는 ‘환난 중에서 경험한 위로의 신학’,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 ‘거짓 교리와 맞서는 교리 수호’, ‘교회 분열을 치유하는 사랑과 진리의 병행’, 그리고 ‘교회 간 연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실천’ 등 다양한 면모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보석 같은 서신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 이미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윤리적 타락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자 더욱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의 편지”를 썼고, 어느 정도 회개 소식을 들은 뒤 다시금 고린도후서를 써서 확실히 방향을 잡아 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이 흘린 눈물과 겪은 환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의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그 환난이 바울에게는 ‘사형선고’ 같았지만, 그것이 바울을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했으며, 결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와 유사한 원리가 현대 교회나 목회자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재현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고린도후서가 결코 과거의 교회 문제만을 다룬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오늘날에도 다양한 위기 상황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 있다. 경제적·정치적 제약이나, 세속 문화의 범람, 혹은 내부적인 반목으로 인해 교회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는 바울의 고백이 적실한 권면으로 다가온다. 바울이 들려준 이 신앙 고백은 단순히 위기를 극복하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삶으로 체득한 사도적 선포다. 그리고 이 선포를 붙든 교회와 지도자는, 바울이 겪은 환난을 이해하고, 또 바울이 경험한 은혜를 공유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세워 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고린도후서는 여러 장에 걸쳐 바울의 심정을 폭넓게 담고 있지만, 핵심은 “인간적인 자랑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자”라는 점으로 수렴된다. 여기에 더해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교회를 살리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현대 교회에 몸담은 성도들이나 목회자들도, 자신이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이 무조건 불행이 아니라, 때로는 깊은 은혜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라고 고백했다. 이는 그의 고난이 곧 교회에 쏟아지는 위로와 은혜의 매개가 되었다는 뜻이다. 교회가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고난당하는 이에게 함께 울면서도 교리의 순수함을 지키도록 노력할 때,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고린도후서는 교회와 성도가 당대의 세속화와 내부 혼란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영적 지침서다. 바울이 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사역을 이어 가는 이들이 곧 교회를 지키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역자들은 이 바울의 심정과 고백을 공유하며,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과 장재형목사의 사역적 연관성을 함께 살필 때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2. 현대 교회의 적용과 목회적 과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은 다양하다. 세속화와 물질주의, 교회 내 분열, 무분별한 이단 침투,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등은 이미 잘 알려진 문제들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가 보여 주듯, 교회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러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교회를 붙드시는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교회가 정말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것인가”를 선택하느냐의 여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목회 원리와 장재형목사의 사역이 만나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직면했던 거짓 교사들은, 때로는 율법주의를 강조하거나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함으로써 교회를 혼돈에 빠뜨렸다. 이처럼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가르침이 들어오면 교회는 쉽게 분열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핵심 교리가 흔들리는 일이 생긴다면 동일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미디어나 교육 사역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의 순수성”과 “바른 신학”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앙의 기초를 흐려 놓는 교리는 결코 허용될 수 없고,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신학적·영적 무장을 철저히 해야 한다. 바울은 왜 거짓 교사들의 말을 그렇게도 강하게 반박했을까. 그것이 교회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교회가 생존하려면, 즉 참된 의미로 존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둘째,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역설을 현대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성도와 지도자는 환난을 ‘피해야 할 대상’ 혹은 ‘가능하면 없어야 할 일’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상황에서 바울은 되레 “이제야말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그 결과 그는 더 담대하게 교회를 돌보고 복음을 지키며, 오히려 교회가 위기를 통해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개척 혹은 선교 사역의 장에서 맞닥뜨린 어려움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면 경제적 제약과 문화적 장벽이 따를 것이고, 미디어 사역을 하다 보면 각종 오해와 비판이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환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붙들게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더 깊은 영적 뿌리를 내리고 성도들이 믿음의 강함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교회의 지도자는 바울이 그랬듯이 “약함 속에서 강함”을 나타내야 한다. 바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약했고, 말도 능변가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자주 능욕과 박해를 당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세속적 장점이나 배경,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며 바울을 깎아내리려 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라고 강조하며,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한다. 현대 교회 지도자가 교회 내외부의 문제를 다뤄야 할 때, 만약 세상적 기준에만 집착하여 재정적 풍요나 조직의 규모를 과시한다면, 교회 본질과 멀어질 위험이 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진정으로 고린도후서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목회자들이라면, 약함을 인정하고, 그 약함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한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는 결국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가능하다. 바울의 이 강조점은 오늘날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통한다.

넷째, 교회 내 갈등이 생겼을 때 책망과 사랑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보이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눈물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교회 안의 죄나 불의를 단호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며, 엄중한 책망 뒤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밝힌다. 현대 교회에서도 갈등이 생겼을 때, 무조건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대충 타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들면, 결국 교리적 타협이 일어나고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 반면에 사랑 없이 강압적 방식으로만 몰아붙이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깊어져서 공동체가 깨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바울이 보여 준 모범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를 지키되, 상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한국과 해외 각지의 사역지에서 여러 갈등을 만났을 것이고, 그때마다 고린도후서가 보여 준 이 ‘책망과 사랑’의 병행 원리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으려면, 잘못된 것을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교정 과정을 거쳐야 하며, 동시에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위로가 펼쳐져야 한다.

다섯째, 교회 간 연대와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예루살렘 구제 헌금을 권면하며,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라고 당부한다. 이는 단순한 모금 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 교회들이 ‘한 몸’임을 증명하는 영적 연대 행위다. 현대 교회들도 국내외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함께 선교와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국가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미디어나 교육을 통해 각 지역 교회가 필요한 자원을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러한 바울적 원리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코로나19 등 전 지구적 위기가 벌어지면서 교회 간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특정 교회가 고난에 빠졌을 때 다른 교회가 힘을 모아 도와주고, 한쪽에서 얻은 신학적 통찰이나 사역 노하우를 서로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고린도후서가 보여 준 교회 연대의 정신이다.

여섯째, 바울이 강조한 “위로의 신학”을 확장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돌보고, 함께 울며, 바울이 말한 “내가 받은 위로로 너희를 위로한다”라는 영적 상호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한 공동체적 위로는 감정적 위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의 위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도록 이끄는 능동적 역할을 한다. 교회가 병상 중에 있는 이들, 가정이 해체 위기에 놓인 이들, 경제적 파산을 겪는 이들, 심지어 신앙적 회의를 느끼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목회 현장이나 여러 미디어에서 간증과 말씀을 나눌 때, 그 내용 안에 ‘부활 신앙’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현대판 ‘위로의 신학’을 실천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일곱째, 교회 안에 거짓 교사나 잘못된 사상이 침투할 때 이를 제대로 분별하고 대처하는 일은 시대를 초월한 과제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졌던 근본 원인은, 사도 바울을 배척하면서 자신들의 사도성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바울의“연약한” 모습과 여러 어려움을 겪은 이력 등을 조롱하면서, 겉보기엔 더 뛰어나 보이는 말과 방식으로 성도들을 현혹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 약함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드러냈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 권위임을 밝혀냈다. 현대 교회도 교회 지도자를 폄하하고, 자신들이 가진 ‘새로운 지식’ ‘새로운 계시’를 내세워 성도들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늘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고린도후서가 준 교훈, 즉 “세속적 스펙이나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얼마나 진실하게 붙들고 있느냐”가 정통성과 권위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교회는 이 분별력을 키워야 하며, 성도들은 지도자의 언행이 성경과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여덟째, 교회가 실제 갈등을 해결하고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눈물로 쓴 편지”에 담긴 바울의 심정과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그저 권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내 말대로 해라”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했고, 잘못된 길을 걷는 이들을 혼냈지만, 동시에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며, 그 모든 책망의 동기가 사랑임을 밝혔다. 지도자가 교회의 분열이나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으려면, 회개를 촉구하되 그 과정을 통해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사람을 돌이키는 힘은 결국 복음에서 오며,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작동한다. 이 두 가치를 어떻게 균형 잡아 적용하느냐가 관건인데,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 균형을 잡아 가는 모습을 읽는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지도자들, 나아가 성도들도 갈등 상황에서 감정적 폭발로 치닫거나, 무조건 묵인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바울과 같은 인내심과 애통함, 그리고 진리 수호의 결연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아홉째,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한 대목은, 현대 교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지침이다. 교회를 건축하거나, 선교지를 개척하거나, 미디어 사역을 확장할 때, 인간적 계획이나 재정력만 바라보면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친다. 그러나 그 순간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 의존’으로 나아가면,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결국 교회가 ‘자기를 의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지도자 스스로가 먼저 그러한 영적 자세를 보여 줘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위험 요소를 감수하면서도 국내외에 선교 네트워크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조직력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복음이 지닌 힘을 전 세계 곳곳에 전하기 위한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무수한 어려움이 뒤따랐을 터이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이 사역이 인간적 수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굳건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열째, 고린도후서가 특정 시점에 쓰인 역사적 문서이면서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적용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신학적 깊이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겪은 ‘환난 중의 위로’라는 주제는, 욥기의 “고난받는 의인”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 주신 ‘십자가의 길’과도 연결된다. 예수님 또한 세상적 영광이나 세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다. 바울은 그 길을 뒤따르며, 자신의 삶에 적용했고, 고린도 교회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현대 교회도 교회 성장학이나 경영학, 혹은 마케팅 전략 등 다양한 방법론을 참고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교회의 근본 동력은 “십자가의 도”에 있고, “부활의 능력”에 있다. 고린도후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도 결국 이 지점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부활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면, 교회는 아무리 외연을 확장해도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열한째, 현대 교회가 직면한 미디어 환경도 고린도 교회 상황과 흡사한 면이 있다. 고린도인들이 헬라 철학이나 수사학에 심취해 바울을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낮게 평가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대중 매체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시대착오적이라 일컫고, 교회 지도자를 향해 ‘세상 흐름을 모른다’고 비판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 세상의 논리에 편승하기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했고, 그 결과로 공동체를 일으켜 세웠다. 장재형목사가 미디어 사역에 주력하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방식으로 대중적 관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십자가와 부활을 기둥 삼아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전달한다면, 그 자체가 현대판 고린도후서의 적용이 될 것이다. 미디어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일수록, 복음을 더욱 진실하고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당장에는 세련된 기법으로 포장된 콘텐츠보다 매력이 없어 보인다 해도, 결국 영혼을 살리는 능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열두째,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나 지도자의 실수, 재정적 투명성 이슈 등이 불거졌을 때도 고린도후서의 원리는 유효하다. 바울은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눈물의 편지”를 통해 그것을 지적했고, 회개를 호소했다. 교회는 잘못을 숨기거나 은폐하려 든다면 오히려 더 큰 위기에 빠진다. 그래서 ‘책망과 징계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고, 그때 바울이 제시한 틀은“사랑이 동기인 책망”이다. 철저히 드러내어 회개하게 하는 동시에, 회개한 사람을 다시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나 성도 모두 “오직 하나님 앞에 선다”라는 인식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사람이 두려워서, 혹은 조직의 체면을 지키려고 잘못을 덮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 교회는 더 큰 분열과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고린도 교회도 그런 위험에 처해 있었으나, 바울의 진심 어린 사랑과 단호함 덕분에 많은 부분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가 이 원리를 지킨다면, 오히려 환난이 올 때 교회가 정화되고 진리를 붙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열셋째, 바울이 고린도후서 전반에 걸쳐 말하는 ‘환난과 위로의 확산’ 원리 또한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환난에서 받은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로 하여금 동일한 위로를 체험하게 해 준다고 말한다. 즉, 고통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 다른 이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영적 위로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 각 개인이 겪는 시련과 극복 과정이 공동체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그 결과로 교회가 전반적으로 성숙해 가는 그림이 성경적 이상이다. 만약 교회가 약한 지체를 돌보지 않고, 스스로 환난을 겪은 자가 침묵하거나 소외된다면, 그 교회는 중요한 은혜의 채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장재형목사나 다른 사역자들이 간증을 통해 자신의 어려움과 극복을 진솔하게 나누는 이유가, 결국 교회 안에 이러한 ‘위로의 선순환’을 일으키기 위함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열넷째, 고린도후서 마지막(13장)에 바울이 남긴 축복과 권면도 현대 교회가 귀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같은 마음을 품으며 평안할지어다”라고 당부한다. 이는 단지 개인적 덕담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온전함에 이르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서로 나누며, 분열을 극복해 같은 마음을 품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라는 구체적 지침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복음을 점검하고, 거짓을 배제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갈등 상황에서 진리를 지키면서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이런 노력은 결코 쉽지 않으나, 고린도후서가 보여 주는 바울의 희생과 눈물, 그리고 그 결과로 찾아온 교회의 회복 과정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포기할 이유는 없다.

결국 현대 교회의 목회적 과제는 고린도후서 안에 집약된 원리들을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문화적 맥락’에 적용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장재형목사가 보여 준 사역 방향을 대입해 볼 수 있다. 예컨대 국내외 선교 현장에서의 도전은 고린도 지역 교회가 마주했던 도전과 다를 바 없고, 미디어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할 때 마주하는 비난 역시 바울이 헬라인들의 지성을 상대하며 겪었던 혼란과 겹친다. 이처럼 시대와 문명이 달라도, 그 속에 반복되는 본질적 문제는 동일한 패턴을 가진다. 따라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뢰한다”라는 고백이야말로, 늘 반복해서 상기해야 할 불변의 원리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이 원리를 삶으로 구현해 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기도다. 바울이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더욱 강해져서 고린도후서를 집필할 수 있었던 궁극적 이유는, 그의 신학 지식이나 열정만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도 수많은 프로그램과 전략, 재정을 동원할 수 있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금방 소진되고 만다. 고린도후서가 가르쳐 주는 대로, “약함 속에서 강함”이 드러나는 것은 곧 성령께서 행하시는 기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간증하는 내용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이 살아나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을 통해,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맥락을 종합해 볼 때, 고린도후서는 ‘고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히려 교회와 사역을 더 확장시키는’ 역설적인 신앙의 원리를 전달해 주는 귀중한 서신이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까지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복음의 순수성, 교회의 거룩성,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라는 이상은,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모든 현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핵심 가치다. 고린도 교회는 처음에는 분열과 세속화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지만, 결국 바울이 보낸 편지와 권면, 그리고 그의 기도와 희생 덕분에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똑같이 현대 교회도 크고 작은 난관 앞에 흔들릴지라도, 바울의 ‘환난 중 위로’ 원리와 ‘부활 신앙’을 따라간다면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사역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교회 개척, 미디어, 교육,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비판이 있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 자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체험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한 이 진리를 지속적으로 붙들 때,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 속에서 복음이 더 강력하게 증거될 것이다. 결국 고린도후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것이 곧 교회가 환난을 이겨 내고, 거짓 교리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세상에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임을 우리는 믿는다.

요컨대 고린도후서는 결코 1세기 초대교회의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21세기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까닭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 그리고 세상의 유혹은 본질상 여전하고, 그 모든 것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부활의 능력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경험한 문제들을 낯설게만 볼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교훈을 얻어 우리의 현재 교회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한껏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사람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이끈다. 현대 교회도 위기 앞에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복음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도, 바울처럼 “이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실천할 때, 교회는 눈물과 갈등을 넘어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가 지금껏 머리로만 이해하던 ‘부활 신앙’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바울이 보여 준 이 모범이야말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계속해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보편적 원리이다. 이렇게 두드러진 메시지를 붙들고, 오늘도 교회는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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