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나님의 주권과 일하심을 바라보는 신앙 (요 5:17, 행 9장 중심)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 역사가 존재함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 예수’로서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에 동역하여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적 통찰을 준다. 믿는 자들이 삶과 사역 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마주하고 수고하고 애쓰지만, 그 모든 배후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믿음과 사역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력으로 오순절이 지나고 사도행전을 읽는 시기에,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와 힘을 깊이 묵상했다고 고백한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성령은 믿는 자들의 삶에 긴밀하게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시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그 사실을 체감하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말씀의 능력 아래 있다”는 경외심과 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격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동역’의 진리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사울의 회심’ 사건을 자세히 해설한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던 자이며, 그리스도교의 ‘적대자’이자 ‘핍박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 ‘원수’를 직접 부르심으로써 오히려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가장 불가능해 보이던 대상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택한 그릇’이 되는 역설이 펼쳐진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서 만나게 된 빛과 음성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예수님의 직접 음성은 이 장면이 최초라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사울을, 주님은 완전히 반전시키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는 주님의 음성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 떨면서 “주여 누구시니이까(행 9:5)”라고 묻는다. 그 순간 그에게 임한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다. 사울이 스스로 변하기를 원해서 회심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다. 예수님의 일하심, 곧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이, 교회가 원수처럼 여기던 이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계셨다. 그리하여 그는 긴장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찾으려고 끙끙 앓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또 다른 인물을 준비하셨으니, 바로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와 “제자”가 선교와 교회 공동체의 핵심적인 직분, 혹은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울(훗날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받아 이방을 향해 나가는 ‘사도’의 역할을 맡고, 아나니아는 제자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하고 눈을 열어 주는 중개 역할을 담당한다.
아나니아가 기도 중에 주의 음성을 듣고, “아나니아야” 하고 주께서 부르실 때, 아나니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즉답한다. 이것은 아나니아가 이미 깊은 영적 관계 속에서 주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반면 사울은 그때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반문했다. 결국 익숙함과 낯섦의 차이는,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이기도 하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신다.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고 있다(행 9:1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보에 대해 일일이 구체적으로 개입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섭리(Providence)’이며, “이미(pre) 다 보고 계시며(videre), 이미 우리를 인도하시는(pre + videre)”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울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아신다. 그리고 동시에 아나니아에게도 사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사울이 지금 기도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그의 눈을 열어 줄 준비를 다 하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만남과 사역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전도나 선교, 혹은 어떤 사람을 돌보게 되는 모든 과정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섭리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이러한 ‘배후 세계’를 인식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사역이 한층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한다.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은 우리를 핍박한 자이며, 여기서도 결박할 권세를 받아 왔습니다”라고 항변하자, 주님은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악인이요, 핍박자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한 그릇’으로 보신다.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고 하심으로, 앞으로 사울이 지게 될 사명의 무게와 권능을 미리 언급하신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사울에게 찾아간다. 당대의 지식인, 가말리엘의 제자로 이름 높았던 사울이, 무명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는 장면이 참으로 놀랍다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주의 동역자의 권세’를 보여 준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무명이고 작아 보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동역하는 자는 당대 최고 지식인도 굴복시킬 만큼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다.
결국 아나니아의 안수로 인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다(행 9:18). 장재형 목사는 이 비늘을, 사울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왜곡된 안목’을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이제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사울은 새로운 눈을 뜬다. 사울을 부르시고(주님), 그 눈을 열어 주신(아나니아)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함께 동역하셨다.
이처럼 사도행전 9장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 세계를 본 사람이, 그 주님의 인도하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역사에 발맞추어 동역한다”는 신앙의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전도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전도는 우리가 누구를 ‘찾아서’ 억지로 끌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고 부르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우리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 가서 연결되는 사건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심히 두려워하던 중, 주께서 밤에 환상 중에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행 18:1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고 계시며, 그에 따라 사역자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는 큰 그림을 보면, 사역자는 근본적으로 ‘협력자’로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또 한 가지 예로, 사도행전 10장을 든다. 10장에는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이달리야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겉보기엔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도 ‘적대자’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이방 군인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 2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고넬료를 소개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인간관에 대한 성경의 독특성’을 설명한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아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구하는 정직한 영혼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엄하며,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 아래 들어올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고넬료는 겉으로는 이방인이고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경건하며 계속 기도했다. 결국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10:4).
고넬료는 낮 제9시(오후 3시)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된다. 천사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욥바로 사람을 보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라”라고 지시한다. 이미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먼저 고넬료의 마음을 열어 두셨고, 그에게 베드로를 연결시킬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고넬료가 이미 ‘기도하는 자’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기도와 구제로 자신을 찾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시며, 그를 향해 세밀하게 역사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베드로 쪽에서의 준비 작업도 진행하신다. 사도행전 10장 9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낮 제6시(정오)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본다. 보자기에 각종 짐승들이 담겨 내려오고, 음성이 들려 “베드로야, 잡아 먹어라”라고 한다. 이에 베드로는 율법적 개념으로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반발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 환상은 단순히 율법 식사의 문제를 넘어,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으며, 더 이상 ‘부정하다’ ‘정하다’의 경계를 판단하는 권한이 베드로에게 없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 즉, 고넬료 같은 이방인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정결하다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환상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의아해”할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집 앞에 다다른다(행 10:17-20)”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편에서는 고넬료를, 다른 한편에서는 베드로를 준비시키시어, 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는 구체적 예”라고 설명한다.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한 것도, 베드로가 미혹 없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것도, 모두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10장 24절 이하에 따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고넬료는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다 모아서 이 사도를 맞이한다. 그는 베드로를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며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존경심을 표한다.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 10:26)”라고 말리지만, 고넬료의 태도에는 이미 영적인 열려 있음과 거룩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하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자신이 4일 전(나흘 전) 제9시 기도 중에 천사를 보았고, 그가 베드로를 청하라고 지시했음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라고 고백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인용하며,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말이야말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세, 말씀을 듣는 자세, 선교와 사역에 참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고, 고넬료와 그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며,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세례가 주어진다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행 10:44~47).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은, 배후에 하나님이 이미 일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그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다시금 환기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동역’의 영적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기도’의 자리를 강조한다. 사도행전 9장의 사울도 기도 중이었고, 10장의 고넬료도 기도 중이었으며, 10장의 베드로도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즉, 기도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두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실 채널을 확장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루 세 번 정시 기도 시간을 지키고, 또 유대인들은 3시, 6시, 9시에 기도하고, 이슬람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로 서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 우리는 ‘땅에 있는 자’(전 5:2)임을 분명히 알고, 늘 “주여, 무엇을 할까요? 어디로 갈까요?”라고 여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까지 섭리적으로 들어오셔서 길을 인도하신다. 교회 예배당의 단상을 청소하는 사소한 일부터, 강단에 올릴 물건을 준비하는 일까지, 늘 ‘거룩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17절, 사도행전 9장과 10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먼저 준비하시는 세계가 있고,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하고 순종할 때 ‘새로운 믿음의 지평’이 열린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 성도들의 사역이 갖춰야 할 ‘영적 리얼리티’라고 장재형 목사는 역설한다. 모든 사역, 모든 봉사, 모든 전도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사울과 고넬료가 예수님을 알게 된 과정을 보면, 결국 그 배후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동역하듯 순종할 때 사울처럼, 고넬료처럼, 사도행전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삶의 길로 도약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2.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9장에 이어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어떻게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는지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준다고 말한다. 이는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미 일하시고 계신다”는 요한복음5장 17절의 실제적 사례이며, 동시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라는 고넬료의 자세가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과 사역 자세를 총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먼저, 사도행전 10장 1~2절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세상적 지위가 높을 뿐 아니라, 군인으로서 직무가 매우 중요하고 바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자였다. 이것은 우리의 편견을 뒤집는다. 세상적, 물리적 권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경건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넬료처럼 진실한 경건과 기도를 유지하며, 물질과 권세를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잠재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서만 진리를 찾으려 하고, 교회 밖의 사람에게는 냉담할 때가 많지만, 고넬료 같은 존재를 통해 성경은 ‘교회 안에만 구도자가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떤 이는 세상적인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교회인보다 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에 힘쓰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자, 죄의 굴레 아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형상의 가치를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고넬료가 받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는 천사의 선언이다(행 10:4).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선행이나 기도가 결코 땅에서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 기억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고넬료는 자신이 믿는 대로 성실히 행했고, 시간이 흐르는 중 하나님이 때가 되어 그에게 천사를 보내시는 것이다.
이어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직접 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하인 둘과 부하 중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낸다(행 10:7). 이렇게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 또한 고넬료의 ‘경건’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보여 준다. 단순히 환상을 보았으니 “베드로를 만나야겠다” 정도가 아니라, ‘즉시’ 행동하되 ‘치밀하게’ 사람을 선발해 보낸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편, 즉 베드로 쪽에서 동시다발적인 준비를 하신다. 베드로가 낮 12시쯤 지붕에 올라 기도할 때, 그도 역시‘배고픔’을 느끼지만 그 상황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환상’을 본다. 보자기 안에 각종 짐승이 들어 있고, “잡아 먹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대꾸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율법적 금기를 지키며 경건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부활을 본 사도라도, ‘율법’을 완전히 파기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통해, 이방인 구원의 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선언된다.
세 번 반복되는 이 메시지는 베드로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인 관습’을 넘어, “이방인도 구원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계획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환상을 본 직후,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한다(행 10:19~20).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시므로, 베드로는 그들을 집에 들여 묵게 하고, 다음 날 그들과 함께 고넬료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보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한다. 하나님의 ‘타이밍’이란, 우리가 시간표를 따로 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정확히 짜두신 ‘영적 네비게이션’과 같다는 것이다. 고넬료의 사람들은 정확히 베드로의 기도 시간 직후에 도착한다. 베드로에게는 환상의 메시지를 통해 “이방인을 받아들이라”는 교훈을 먼저 가르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매 순간 이중, 삼중으로 사람과 상황을 준비하셔서,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의 인도’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드신다.
결정적으로,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고넬료는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겸손히 환영한다(행10:25). 베드로는 그를 일으키며 ‘자신도 사람일 뿐’임을 밝히지만, 이는 고넬료의 경외심이 단지 ‘사람을 숭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에게 보이는 경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고넬료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라고 말한 대목은, 장재형 목사가 가장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척,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베드로가 전해줄 복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배자로서“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를 사모한 것이다. 이 모습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예배와 말씀, 선교와 사역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설교를 ‘사람의 말’로 듣고, 교회 봉사나 전도를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만 여기기 쉽다. 그러나 고넬료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서로를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동역자”로 보고,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는 경외심으로 접근하면, 사역의 차원이 달라진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 집안에 성령이 임한다(행 10:44). 베드로가 “말을 할 때” 성령이 임한 것을 보고, 베드로와 동행한 사람들은 경이로워한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로,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라고 선언한다(행 10:47).
장재형 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이처럼 모든 인간적인 경계를 뛰어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만일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를 소홀히 했다면, 혹은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둘의 만남과 구원 역사는 불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실패하지 않고, 기도로 깨어 있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전도와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을 발견하고 만나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금 언급한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두려워할 때, 주께서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행 18:10)”고 하신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쪽에서 ‘듣는 귀’를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는지, 누구를 만나게 하시는지’를 민감하게 살피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거룩과 두려움으로” 임하라는 권면을 전한다. 예를 들어, 단상을 청소하는 일, 예배실에 놓을 꽃을 준비하는 일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쌓일수록, 우리는 정말로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일상 안에서 체화되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무엇보다도 첫째, “기도하는 자”가 될 것을 촉구한다. 고넬료, 베드로, 사울(바울) 모두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직접적 인도와 음성을 경험했다. 우리 시대에도, 정시 기도든 무시 기도든 간에 꾸준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아버지께서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늘 묻고 깨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사람과 상황을 대할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라”고 권면한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향해 두려움을 느꼈듯이, 사람의 시선에는 ‘저 사람은 악인이고, 절대 복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한 그릇’이라고 보신다. 고넬료처럼 ‘이방인 군대의 장교’라는 특수한 환경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심령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혹은 어떤 상황을 직면하든지, “이미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역사하고 계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주님의 사자를 대하듯 서로를 대하라”고 조언한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렸듯이, 지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말씀을 증언하거나, 혹은 우리를 섬기는 형제자매들에게도, 마치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베드로가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니라”고 말렸듯이, 지나친 우상화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하나님께 부름받아 나에게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영적 시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사역, 선교, 교육, 봉사는 사람이 주도하기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계획하고, 조직하고, 때로 결과에 일희일비하기 쉽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선언대로,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우리는 뒤따르는 자다. 이것을 철저히 인식할 때, 우리의 사역은 단순한 ‘인간적 열심’이 아니라, ‘신적 섭리와 동역’이 된다.
요한복음 5장 17절의 말씀, 사도행전 9장과 10장의 스토리는, 우리의 신앙과 사역, 전도와 선교가 “우리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게 만든다. 사울(바울)의 회심과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인간적으로 원수 같던 자’를, ‘가장 먼 이방인처럼 보이던 자’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보이신다. 그리고 그 절묘한 과정을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인 아나니아와 베드로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결론을 맺으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시고,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자세로 일상을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우리의 모든 예배, 기도, 섬김,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감할 때 신앙의 깊이가 달라진다.
장재형 목사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선언과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한 고넬료의 자세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키고자 한다. 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전장’에서 펼쳐지는 것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보다 담대해지고, 감사하게 되고, 겸손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더욱 집중하며 그분의 음성에 민감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는 순종으로 동참하는 사역 방식을 몸소 체득하도록, 성경 본문(특히 사도행전)과 교회 역사,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사역적 과제들을 계속 연결해 보라고 도전한다. 그러면 교회의 예배와 선교,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 새로운 차원의 부흥과 기적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예수님이 보여 주신“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삶”의 길이며, 사도행전 9~10장에 기록된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이 사실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장(행 9장, 행 10장)을 관통하는 공통 분모는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시고,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이 기도와 순종으로 응답할 때 구원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펼쳐진다”는 진리다. 사울의 회심과 아나니아의 사역, 고넬료의 기도와 베드로의 환상은 모두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 역시 동일한 원리를 붙들고 살아가야 함을, 장재형 목사는 열정적으로 호소한다.
결국 결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하신다’는 확신 위에 선다. 우리가 이 확신을 품고, “하나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기대하며 기도할 때,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마땅히 만나야 할 사람에게로, 가야 할 자리로, 순종의 길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 길을 갈 때,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역사’가 다시금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믿는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이 단지 1세기에만 해당하는 제한된 진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영적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고넬료의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말도, 단지 그가 베드로에게 했던 환영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예배와 말씀, 선교 현장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마음가짐임을 배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자’가 될 때,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거룩한 교감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관념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능력’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은 결국 교회를 세우고, 가정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며, 영혼들을 구원하는 길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성령의 시대”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우리의 동역’을 한 편의 큰 드라마로 비유한다. 어떤 무대에선 우리가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성삼위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쓰시는 배우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우는 연출자의 지시에 민감하고, 대본에 집중하며, 연기에 헌신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음성을 따라 움직일 때, 사울과 고넬료가 온전한 ‘역할’을 감당해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듯, 우리도 우리가 속한 시대와 공동체 안에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선언,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장재형 목사는 기도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을 표한다. 그리고 그 확신 위에, 매일의 기도를 통해, 순간순간의 결정을 통해,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장재형목사는 독려한다.
요한복음 5장 17절과 사도행전 9~10장을 통해 장재형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크고 작은 일을 할 때마다, 그 모든 삶의 배후에는 이미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 섭리와 부르심 속으로 초청하시며, “내가 이미 아나니아를 준비했고, 사울을 부르듯, 고넬료를 준비했고,베드로를 보내듯, 오늘 너희도 그 동역의 길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음성에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예배와 헌신으로 응답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이전과 다른 차원의 믿음과 사역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고백을 삶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강조해 온, 복음적이고도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의 실제적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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