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나라가 임하옵시며

1.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기도로 알려져 있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친밀한 부름으로 시작하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그분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각각 기록된 주기도문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나, 기록 시점과 저자의 정황에 따라 다소 다른 표현을 보이기도 한다. 마태복음의 기록자인 마태는 유대인이었기에 예수께서 유대인의 메시야가 되심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했다. 반면에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이로 인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메시야로서 드러난다.

특히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교회의 역사와 비전을 끊임없이 이끌어 온 영적 지도자로서, 성도들이 더욱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간절히 바라보며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독려한다. 그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메시지는, 주기도문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대전제와 기도자의 세 가지 간구를 분명히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라는 것이다. 첫째 대전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고, 둘째 대전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이 두 가지 대전제를 견고히 붙들고 기도할 때, 우리가 진정 바르고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그 기도를 통해 진정한 변화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특히,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기도문이 직접 제시한다. 야고보서 4장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했듯이, 우리 기도가 빗나가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기 때문이 많다. 그러나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올바른 기도의 목적은“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는 점이, ‘장재형 목사’가 줄곧 강조해 온 메시지의 핵심 중 하나다.

또한 주기도문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현재의 문제), 용서에 대해 기도하며(과거의 문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미래의 문제) 세 가지 간구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간구에 앞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것의 초점이 되게 하는 ‘두 대전제’가 자리 잡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일상의 실제적인 요구와 미래에 대한 불안 혹은 과거의 상처 등 다양한 기도 제목이 있다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나라를 높이는 태도를 갖출 때에야 비로소 그 기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주기도문의 이러한 구조와 신학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과 방향을 명확히 일러주는데, ‘장재형 목사’는 이를 실제 사역에 적용하면서 교회 내 여러 부문에서 꾸준히 가르쳐 왔다.

특히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문구를 두고, 영어권 성경 번역본인 KJV(King James Version)의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과 NIV, ESV 등의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을 비교하는 논의가 있었다. KJV에는 “in earth”라는 표현이 있어,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온 땅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스며드는 이미지를 더 풍부하게 떠올리게 한다. 반면 “on earth”는 건축적이고 외적 확장의 뉘앙스를 전한다. 두 표현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들어가면서도, 동시에 외형적으로도 드러나고 확장된다는 복합적인 이미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모두 의미가 깊다. ‘장재형 목사’ 또한 이 부분을 자주 강조하며,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은 영혼 구원과 내적 변화는 물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구조와 문화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의미한다. 이 나라는 구원받은 성도가 간절히 사모하는 목표이자,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도로서 구하라 하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 도래했지만 동시에 완성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를 “이미와 아직 사이(already but not yet)”라고 부른다. 중생(born again)과 성령의 내주를 체험한 성도라면, 이 땅에 임하여 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고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중생(born again),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신앙적 정체성을 갖출 때,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이라는 기도의 내용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간절히 바랄 수 있게 된다.

한편, 교회의 역사와 함께하면서도 때로는 교리를 둘러싼 신학적 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천년왕국론을 놓고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다양한 관점이 갈라지고, 교회 내에서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때로는 뜨겁게 분쟁을 일으킨다. 에반젤리컬 계통 일부는 세상이 점점 더 타락하고 악해질수록 주님 재림의 때가 가까워진다고 믿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완성은 불가능하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반면에 특정 교단이나 신학 전통에서는 이미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라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여, 미래적 종말에 대한 기대를 간과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 주기도문을 통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치셨고, 그것이 기독교인이 간절히 구해야 할 기도임을 분명히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면서도, 동시에 이 땅에서 그 나라가 실제로 확장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바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공동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 가고, 각 지역 교회와 선교 단체가 더욱 성장하고 확장되어, 인류 삶의 구석구석에 복음의 누룩이 파고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후서 3장에 나타난 말씀은 우리의 신앙 태도를 더욱 날카롭게 일깨운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모든 것이 계속 같지 않느냐?”라고 비웃지만, 베드로 사도는 “주의 날이 도둑같이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결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역사(役事)가 수렴될 것을 역설한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의식을 단순히 ‘이 세상이 곧 망할 것이니 포기하자’라는 체념적 자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믿고,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 열심히 주님의 뜻을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한다. 이처럼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통치를 사모하며, 오늘날 개인과 교회가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이유로,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선교, 그리고 실제적인 봉사와 섬김이 병행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명령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선교 사명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히 확장될 수 있도록 사회, 문화, 학문, 예술, 건축, 경영 등 여러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교회가 건축을 잘하는 인재를 세우거나, 문화를 변화시키는 예술가를 발굴하고, 사회 구성원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다양한 기관을 설립하는 일은 모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는 기도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다.

최근 WEA(세계복음주의연맹)의 세계총회에서 “Thy kingdom come”이라는 주제를 내세웠는데, 이는 교회가 단순히 구호만 외치거나 하늘나라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준비하며 행동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교회가 종말론적 긴장감과 동시에 현장 속 변혁의 의지를 균형 있게 견지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교회 내 여러 대학 설립 사례도 이러한 비전을 뒷받침한다. 16년 동안 함께 사역해 온 세 분의 교수(윌리암 와그너, 죠셉 레이 톨먼, 메릴 스모크)에게 각각 Great Commission University, Harvest University, Jubilee University를 맡겨‘챈슬러(Chancellor)’가 되도록 했고, 이들의 이름을 기념하는 도서관도 세울 예정이다. 또한 티엔더(Tyndale) 박사, 카올리(Caoli) 박사 등 오랜 시간 교회와 함께하며 학문적으로, 사역적으로 기여해 온 분들의 이름을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도시의 도서관에 기념으로 남겨, 다음 세대가 이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사역자들의 이름을 후대에 전함으로써 이들이 걸어온 믿음의 길과 헌신을 교회 역사에 고스란히 새기고, 더욱 굳건한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겠다는 취지다.

나아가 앞으로의 7년은 주로 건축적, 공학적 사역이 강화될 전망이다. 교회와 학교, 선교 사역지를 스스로 건립하고 만들어 나가는 역량을 키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 여러 대륙의 지체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해 자신들의 기술과 재능으로 지역사회와 대륙 전체를 바꿔 보려는 비전을 품고 있다. ‘장재형 목사’ 또한 이러한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단순히 ‘하늘나라’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를 실제로 만들어 가는 초석을 다지려 한다.

결국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핵심 사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주기도문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두 대전제가 확고히 서야만 우리의 기도와 사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현재)”, “과거의 상처와 억울함, 죄책을 용서와 은혜로 풀어내는 것(과거)”, “시험과 죄에 빠지지 않고 악으로부터 건져 달라고 기도하는 것(미래)”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실제적인 유익과 보호막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간구 역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에 초점을 맞춘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수차례 해 온 주기도문 강해가 바로 이 점을 역설하며, 교회의 공동체성과 성도의 거룩한 삶을 강조해 왔다.

오늘날 교회가 점점 세속화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Thy kingdom come”을 외치면서 그 ‘나머지 구절’인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차피 세상은 나빠질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라는 식으로 체념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교회 안에서 완성되었다’라는 논리에 매몰되어 과감한 변화를 주저한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본질,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곰곰이 묵상해 보면, 역사와 문화, 삶의 현장 전체를 변화시키는 생명력 있는 복음 운동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이 사역을 온전히 감당해 낼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접하게 될 것이고, 결국 이 비전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항상 미래를 밝게 바라본다. 아무리 어둠이 짙어져 가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다. 이 확신은 곧 성도들에게도 전해진다. 예수님 믿는 이들이라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삶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내 어느 지체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장재형 목사’가 제안하는 “매 7년마다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자”는 도전 속에서 미래를 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다. 이 비전을 공유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꿈을 붙들고 살아가는 공동체야말로 정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헌신하는 공동체다.

결국 주기도문에서 발견되는 이 놀라운 방향성은, 개인의 경건 생활에서 끝나지 않고 온 세계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장재형 목사’가 설파하는 것처럼, 교회가 교회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주기도문의 핵심 가르침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거룩한 소명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친히 제시하신 비유들(씨 뿌리는 자, 겨자씨, 누룩 등)은 모두 이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고 내면화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교회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확장해 가는 주체이고, 한편으로는 그 나라가 개인의 영혼과 삶 속 깊이 파고들도록 돕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에, 그 중심 사상과 동력도 예수님에게서 온다. 성도들이 이 기도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그 안에 담긴 소망과 기쁨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바울 사도가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말했듯,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이들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여긴다(롬 8:18). 주기도문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간절히 바라보게 하고, 동시에 현재의 구체적 기도와 실천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사랑으로 연대하며 교회를 세워 나갈 때, 그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펼치길 원하신다. 교회가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 서로 상처 주고받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는 기도대로 실제 행동에 나설 때, 그 변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지역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라는 키워드는, 단순히 한 지도자의 이름이 아니라, 주기도문에 입각한 신앙적 비전과 실천을 상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그가 이끄는 교회 공동체와 여러 사역의 발전은 단순한 기관 확장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명확히 보여 준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인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를 먼저 구하며, 그것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용서와 보호를 위한 기도를 이어 갈 때, 비로소 기도의 선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가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비전은 교회가 이 대전제를 더욱 선명히 붙잡고, 세상 한가운데에서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역사의 종말과 교회의 사명 

주기도문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문이나 암송 기도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 역사와 교회의 사명을 밝히 보여 주는 결정적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문구를 살아 있는 현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바로 여기서 교회 공동체는 종말론적 희망을 품되, 그 희망을 근거로 현 세계를 방치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열심히 이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려는 도전에 직면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까지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태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마5:13–14)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빛은 어둠을 밝히며 길을 안내한다. 즉, 하나님나라는 그 백성의 존재 자체를 통해 벌써부터 이 땅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화하는 현장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선교, 교육, 봉사, 문화 사역 등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데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헌신과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왜 더욱 실제적인 프로젝트와 비전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세워 나가는 대학과 연구소, 도서관 등은 지식만을 쌓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정의와 사랑, 그리고 복음의 가치가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사역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한다. 건축과 공학에 대한 투자는 교회가 물리적인 공간과 시설을 마련함으로써,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이 교육받고 새로운 비전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또, 예술과 문화, 미디어,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창의적 활동이 일어날 때, 세상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생생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는 단지 교회가 세속적인 영역에 “진출”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구현해 보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가 역사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거나,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의미하는 바는, 결국 그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개혁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려는 노력을 이어 가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조금씩 확장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현재 교회가 부족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보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끝날이 곧 오니, 지금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일 뿐”이라고 단정 지으려 할 때, 주기도문은 분명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완전하게 실현된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 계획이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교회와 성도가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지난 7년, 또 그 이전의 주기마다 교회 공동체가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으로 직접 성벽을 재건하고, 사역지와 캠퍼스를 세우며,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해 온 이유다. 특히,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 등에는 인프라가 부족하더라도 열정이 충만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교회와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그 지역 사회는 교회가 전해 주는 복음뿐 아니라 실제적인 기술과 교육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이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릴 때,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역사가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 공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고 말하며, 영적인 확장뿐 아니라 실제 건축, 문화, 예술, 경영의 영역에서도 교회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것을 독려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 내의 다채로운 인재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누군가는 말씀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여, 인류의 영적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또 다른 누군가는 건축·엔지니어링, IT, 미디어, 예술 분야 등에서 전문가로 양성되어, 땅 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 구원과 삶의 개선이 함께 가는 총체적 개념이며,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비전은 교회가 이 두 면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한쪽 극단만을 고집하지 않도록 지도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정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일에 모두가 합심해 나가야 함을 설파한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에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며 역사를 단지 반복되는 순환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하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역사는 직선적이며, 결국 하나님나라가 도래함으로 완결된다는 전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날을 바라보는 이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라”(벧후 3:11-12)는 권면에 응답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과 경건함”은 단지 개인의 윤리적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 사회적 관계 전반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통치를 드러내라는 포괄적 요청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 속에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와 더불어 공동체와 세계의 실제적인 변화를 함께 추구하라는 당위가 담겨 있다.

현실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예를 들어 기근, 환경 파괴, 인종 차별, 경제적 불평등, 전쟁 등—은 교회가 선교와 봉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영역이다. 만약 교회가 “우리는 이미 천국 갈 사람들이니 세상 일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등을 돌리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 주신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말씀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주기도문을 실제로 실천한다는 것은, 오늘날 이 지구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협력한다는 뜻과도 맞닿아 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되,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정의와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사역 역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구절의 확장된 해석이며, ‘장재형 목사’는 이를 위해 대학 교육과 연구, 의료봉사, 구제활동 등 다방면의 노력을 교회가 감당해 내야 함을 가르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부각되는 이유는, 그가 교회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성도들에게 상기시키며 실제로 행동하도록 이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단순히 영적 부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주변 사회, 그리고 전 세계의 이웃들이 실제로 변화되고 복음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젝트를 전개해 왔다. 예컨대, 교회 내에 세워진 여러 대학—Great Commission University, Harvest University, Jubilee University—는 학문과 신앙이 결합된 교육의 장을 제공하여, 지식이 영적인 소명과 결합되도록 돕는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학생들은 지역사회와 세계 각지로 파송되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질서와 은혜를 조금씩 이 땅 위에 세워 나가는 주역이 될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성도들과 동역자들이 16년 이상 함께하면서 끊임없이 협력해 온 것은, 단지 한 명의 지도자나 몇몇 간부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 비전이 심장부에서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7년, 14년, 21년, 28년이라는 중요한 시간의 매듭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문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Thy kingdom come”이라는 기도를 더욱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친히 이끄시고, 또한 교회가“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에 대한 순종과 실천을 이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시점에서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주기도문의 본질을 상기시키며, 두 가지 대전제—“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를 결코 놓치지 말라고 강조한다. 특히,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망라하는 기도의 세 가지 간구 역시 이 대전제를 전제로 해야만 올바른 길로 가게 됨을 재확인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한 변화는 타인의 영혼과 삶을 귀히 여기며, 이들이 하나님나라의 공동상속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교회가 건축이나 사업, 혹은 선교 확장에만 몰두하며 정작 영혼 구원이나 신앙 훈련을 소홀히 한다면, 결국 주기도문의 본질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 땅에서의 사회 변혁이나 현실적 도움, 교육과 문화 사역에는 무관심하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라는 주님의 기도를 반쯤만 붙들고 있는 격이 된다. 따라서 교회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춰야 하며,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와 교회 지도부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폭력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보여 주신 섬김과 사랑,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헌신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원리다. 그렇기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외치는 성도들은, 그 기도에 걸맞게 겸손과 희생, 그리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강조하며, 교회가 외형적으로만 성장하는 것을 경계한다.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오히려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으로 인도하고, 그 삶의 전반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퍼지도록 섬길 때 현실화된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이 지향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진수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도 겨자씨와 누룩은 미약해 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교회가 소수일지라도,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붙들며 나아간다면 지역과 문화, 경제, 정치 모든 분야에 누룩처럼 스며들어 거룩한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미 완벽한 하나님나라가, “땅에서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신비이자 은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가 이끄는 교회는 여러 사역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이미 그 가능성을 맛보고 있다. 28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갈 길이 멀고, 새로운 도전들이 교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주기도문의 정신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을 주야로 묵상하고 실천한다면, 분명 이전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결국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바라보게 한다. 종말을 기다리되 이 땅에서의 책임을 다하고, 하늘의 기쁨을 소망하되 지금의 고통을 덜어 주며,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면서 내 주변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결코 무기력하거나 방관적으로 머무를 수 없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일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셨구나!”라는 깨달음 속에서 더 힘차게, 더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는, 성도들을 일깨우고 격려하며 함께 기도하고 비전을 나누는 ‘장재형 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대에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수많은 도전은 주기도문의 가치와 정신을 재발견함으로써 해답을 찾게 된다. 주기도문은 과거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새로운 부흥의 씨앗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예배와 선교, 교육과 봉사, 문화 변혁 등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장재형 목사”가 지속적으로 주기도문을 강해하고, 그것을 교회의 실천 지침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교회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먼저 맛보고 살아 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7년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시고, 더 많은 영혼이 복음을 통해 자유와 생명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야말로 주기도문이 품고 있는 깊은 신비이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결코 공허한 구호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가 이를 붙들고 한 걸음씩 전진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이나 국적, 문화적 배경을 초월해 온 인류 가운데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올려 드리는 예배자로서, 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대사로서, 거룩한 사명을 이어 갈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반한 복음이기에,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개인과 가정, 그리고 온 세상을 변화시킬지 기대를 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교회는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계속 전진한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체험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한다면, 이 땅에도 분명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빛이 점점 더 선명하게 번져 갈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현장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날을 고대하며, 모든 성도가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장재형 목사’가 꿈꾸며 전해 온 기도의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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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시는 하나님 – 장재형목사

1. 하나님의 주권과 일하심을 바라보는 신앙 (요 5:17, 행 9장 중심)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 역사가 존재함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 예수’로서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에 동역하여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적 통찰을 준다. 믿는 자들이 삶과 사역 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마주하고 수고하고 애쓰지만, 그 모든 배후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믿음과 사역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력으로 오순절이 지나고 사도행전을 읽는 시기에,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와 힘을 깊이 묵상했다고 고백한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성령은 믿는 자들의 삶에 긴밀하게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시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그 사실을 체감하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말씀의 능력 아래 있다”는 경외심과 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격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동역’의 진리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사울의 회심’ 사건을 자세히 해설한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던 자이며, 그리스도교의 ‘적대자’이자 ‘핍박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 ‘원수’를 직접 부르심으로써 오히려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가장 불가능해 보이던 대상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택한 그릇’이 되는 역설이 펼쳐진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서 만나게 된 빛과 음성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예수님의 직접 음성은 이 장면이 최초라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사울을, 주님은 완전히 반전시키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는 주님의 음성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 떨면서 “주여 누구시니이까(행 9:5)”라고 묻는다. 그 순간 그에게 임한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다. 사울이 스스로 변하기를 원해서 회심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다. 예수님의 일하심, 곧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이, 교회가 원수처럼 여기던 이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계셨다. 그리하여 그는 긴장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찾으려고 끙끙 앓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또 다른 인물을 준비하셨으니, 바로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와 “제자”가 선교와 교회 공동체의 핵심적인 직분, 혹은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울(훗날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받아 이방을 향해 나가는 ‘사도’의 역할을 맡고, 아나니아는 제자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하고 눈을 열어 주는 중개 역할을 담당한다.

아나니아가 기도 중에 주의 음성을 듣고, “아나니아야” 하고 주께서 부르실 때, 아나니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즉답한다. 이것은 아나니아가 이미 깊은 영적 관계 속에서 주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반면 사울은 그때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반문했다. 결국 익숙함과 낯섦의 차이는,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이기도 하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신다.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고 있다(행 9:1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보에 대해 일일이 구체적으로 개입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섭리(Providence)’이며, “이미(pre) 다 보고 계시며(videre), 이미 우리를 인도하시는(pre + videre)”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울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아신다. 그리고 동시에 아나니아에게도 사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사울이 지금 기도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그의 눈을 열어 줄 준비를 다 하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만남과 사역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전도나 선교, 혹은 어떤 사람을 돌보게 되는 모든 과정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섭리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이러한 ‘배후 세계’를 인식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사역이 한층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한다.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은 우리를 핍박한 자이며, 여기서도 결박할 권세를 받아 왔습니다”라고 항변하자, 주님은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악인이요, 핍박자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한 그릇’으로 보신다.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고 하심으로, 앞으로 사울이 지게 될 사명의 무게와 권능을 미리 언급하신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사울에게 찾아간다. 당대의 지식인, 가말리엘의 제자로 이름 높았던 사울이, 무명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는 장면이 참으로 놀랍다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주의 동역자의 권세’를 보여 준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무명이고 작아 보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동역하는 자는 당대 최고 지식인도 굴복시킬 만큼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다.

결국 아나니아의 안수로 인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다(행 9:18). 장재형 목사는 이 비늘을, 사울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왜곡된 안목’을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이제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사울은 새로운 눈을 뜬다. 사울을 부르시고(주님), 그 눈을 열어 주신(아나니아)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함께 동역하셨다.

이처럼 사도행전 9장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 세계를 본 사람이, 그 주님의 인도하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역사에 발맞추어 동역한다”는 신앙의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전도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전도는 우리가 누구를 ‘찾아서’ 억지로 끌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고 부르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우리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 가서 연결되는 사건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심히 두려워하던 중, 주께서 밤에 환상 중에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행 18:1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고 계시며, 그에 따라 사역자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는 큰 그림을 보면, 사역자는 근본적으로 ‘협력자’로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또 한 가지 예로, 사도행전 10장을 든다. 10장에는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이달리야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겉보기엔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도 ‘적대자’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이방 군인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 2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고넬료를 소개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인간관에 대한 성경의 독특성’을 설명한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아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구하는 정직한 영혼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엄하며,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 아래 들어올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고넬료는 겉으로는 이방인이고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경건하며 계속 기도했다. 결국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10:4).

고넬료는 낮 제9시(오후 3시)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된다. 천사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욥바로 사람을 보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라”라고 지시한다. 이미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먼저 고넬료의 마음을 열어 두셨고, 그에게 베드로를 연결시킬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고넬료가 이미 ‘기도하는 자’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기도와 구제로 자신을 찾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시며, 그를 향해 세밀하게 역사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베드로 쪽에서의 준비 작업도 진행하신다. 사도행전 10장 9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낮 제6시(정오)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본다. 보자기에 각종 짐승들이 담겨 내려오고, 음성이 들려 “베드로야, 잡아 먹어라”라고 한다. 이에 베드로는 율법적 개념으로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반발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 환상은 단순히 율법 식사의 문제를 넘어,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으며, 더 이상 ‘부정하다’ ‘정하다’의 경계를 판단하는 권한이 베드로에게 없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 즉, 고넬료 같은 이방인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정결하다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환상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의아해”할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집 앞에 다다른다(행 10:17-20)”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편에서는 고넬료를, 다른 한편에서는 베드로를 준비시키시어, 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는 구체적 예”라고 설명한다.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한 것도, 베드로가 미혹 없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것도, 모두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10장 24절 이하에 따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고넬료는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다 모아서 이 사도를 맞이한다. 그는 베드로를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며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존경심을 표한다.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 10:26)”라고 말리지만, 고넬료의 태도에는 이미 영적인 열려 있음과 거룩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하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자신이 4일 전(나흘 전) 제9시 기도 중에 천사를 보았고, 그가 베드로를 청하라고 지시했음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라고 고백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인용하며,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말이야말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세, 말씀을 듣는 자세, 선교와 사역에 참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고, 고넬료와 그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며,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세례가 주어진다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행 10:44~47).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은, 배후에 하나님이 이미 일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그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다시금 환기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동역’의 영적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기도’의 자리를 강조한다. 사도행전 9장의 사울도 기도 중이었고, 10장의 고넬료도 기도 중이었으며, 10장의 베드로도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즉, 기도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두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실 채널을 확장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루 세 번 정시 기도 시간을 지키고, 또 유대인들은 3시, 6시, 9시에 기도하고, 이슬람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로 서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 우리는 ‘땅에 있는 자’(전 5:2)임을 분명히 알고, 늘 “주여, 무엇을 할까요? 어디로 갈까요?”라고 여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까지 섭리적으로 들어오셔서 길을 인도하신다. 교회 예배당의 단상을 청소하는 사소한 일부터, 강단에 올릴 물건을 준비하는 일까지, 늘 ‘거룩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17절, 사도행전 9장과 10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먼저 준비하시는 세계가 있고,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하고 순종할 때 ‘새로운 믿음의 지평’이 열린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 성도들의 사역이 갖춰야 할 ‘영적 리얼리티’라고 장재형 목사는 역설한다. 모든 사역, 모든 봉사, 모든 전도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사울과 고넬료가 예수님을 알게 된 과정을 보면, 결국 그 배후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동역하듯 순종할 때 사울처럼, 고넬료처럼, 사도행전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삶의 길로 도약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2.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9장에 이어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어떻게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는지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준다고 말한다. 이는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미 일하시고 계신다”는 요한복음5장 17절의 실제적 사례이며, 동시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라는 고넬료의 자세가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과 사역 자세를 총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먼저, 사도행전 10장 1~2절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세상적 지위가 높을 뿐 아니라, 군인으로서 직무가 매우 중요하고 바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자였다. 이것은 우리의 편견을 뒤집는다. 세상적, 물리적 권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경건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넬료처럼 진실한 경건과 기도를 유지하며, 물질과 권세를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잠재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서만 진리를 찾으려 하고, 교회 밖의 사람에게는 냉담할 때가 많지만, 고넬료 같은 존재를 통해 성경은 ‘교회 안에만 구도자가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떤 이는 세상적인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교회인보다 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에 힘쓰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자, 죄의 굴레 아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형상의 가치를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고넬료가 받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는 천사의 선언이다(행 10:4).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선행이나 기도가 결코 땅에서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 기억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고넬료는 자신이 믿는 대로 성실히 행했고, 시간이 흐르는 중 하나님이 때가 되어 그에게 천사를 보내시는 것이다.

이어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직접 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하인 둘과 부하 중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낸다(행 10:7). 이렇게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 또한 고넬료의 ‘경건’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보여 준다. 단순히 환상을 보았으니 “베드로를 만나야겠다” 정도가 아니라, ‘즉시’ 행동하되 ‘치밀하게’ 사람을 선발해 보낸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편, 즉 베드로 쪽에서 동시다발적인 준비를 하신다. 베드로가 낮 12시쯤 지붕에 올라 기도할 때, 그도 역시‘배고픔’을 느끼지만 그 상황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환상’을 본다. 보자기 안에 각종 짐승이 들어 있고, “잡아 먹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대꾸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율법적 금기를 지키며 경건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부활을 본 사도라도, ‘율법’을 완전히 파기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통해, 이방인 구원의 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선언된다.

세 번 반복되는 이 메시지는 베드로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인 관습’을 넘어, “이방인도 구원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계획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환상을 본 직후,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한다(행 10:19~20).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시므로, 베드로는 그들을 집에 들여 묵게 하고, 다음 날 그들과 함께 고넬료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보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한다. 하나님의 ‘타이밍’이란, 우리가 시간표를 따로 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정확히 짜두신 ‘영적 네비게이션’과 같다는 것이다. 고넬료의 사람들은 정확히 베드로의 기도 시간 직후에 도착한다. 베드로에게는 환상의 메시지를 통해 “이방인을 받아들이라”는 교훈을 먼저 가르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매 순간 이중, 삼중으로 사람과 상황을 준비하셔서,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의 인도’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드신다.

결정적으로,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고넬료는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겸손히 환영한다(행10:25). 베드로는 그를 일으키며 ‘자신도 사람일 뿐’임을 밝히지만, 이는 고넬료의 경외심이 단지 ‘사람을 숭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에게 보이는 경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고넬료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라고 말한 대목은, 장재형 목사가 가장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척,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베드로가 전해줄 복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배자로서“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를 사모한 것이다. 이 모습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예배와 말씀, 선교와 사역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설교를 ‘사람의 말’로 듣고, 교회 봉사나 전도를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만 여기기 쉽다. 그러나 고넬료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서로를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동역자”로 보고,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는 경외심으로 접근하면, 사역의 차원이 달라진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 집안에 성령이 임한다(행 10:44). 베드로가 “말을 할 때” 성령이 임한 것을 보고, 베드로와 동행한 사람들은 경이로워한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로,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라고 선언한다(행 10:47).

장재형 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이처럼 모든 인간적인 경계를 뛰어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만일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를 소홀히 했다면, 혹은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둘의 만남과 구원 역사는 불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실패하지 않고, 기도로 깨어 있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전도와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을 발견하고 만나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금 언급한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두려워할 때, 주께서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행 18:10)”고 하신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쪽에서 ‘듣는 귀’를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는지, 누구를 만나게 하시는지’를 민감하게 살피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거룩과 두려움으로” 임하라는 권면을 전한다. 예를 들어, 단상을 청소하는 일, 예배실에 놓을 꽃을 준비하는 일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쌓일수록, 우리는 정말로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일상 안에서 체화되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무엇보다도 첫째, “기도하는 자”가 될 것을 촉구한다. 고넬료, 베드로, 사울(바울) 모두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직접적 인도와 음성을 경험했다. 우리 시대에도, 정시 기도든 무시 기도든 간에 꾸준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아버지께서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늘 묻고 깨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사람과 상황을 대할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라”고 권면한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향해 두려움을 느꼈듯이, 사람의 시선에는 ‘저 사람은 악인이고, 절대 복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한 그릇’이라고 보신다. 고넬료처럼 ‘이방인 군대의 장교’라는 특수한 환경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심령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혹은 어떤 상황을 직면하든지, “이미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역사하고 계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주님의 사자를 대하듯 서로를 대하라”고 조언한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렸듯이, 지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말씀을 증언하거나, 혹은 우리를 섬기는 형제자매들에게도, 마치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베드로가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니라”고 말렸듯이, 지나친 우상화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하나님께 부름받아 나에게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영적 시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사역, 선교, 교육, 봉사는 사람이 주도하기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계획하고, 조직하고, 때로 결과에 일희일비하기 쉽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선언대로,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우리는 뒤따르는 자다. 이것을 철저히 인식할 때, 우리의 사역은 단순한 ‘인간적 열심’이 아니라, ‘신적 섭리와 동역’이 된다.

요한복음 5장 17절의 말씀, 사도행전 9장과 10장의 스토리는, 우리의 신앙과 사역, 전도와 선교가 “우리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게 만든다. 사울(바울)의 회심과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인간적으로 원수 같던 자’를, ‘가장 먼 이방인처럼 보이던 자’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보이신다. 그리고 그 절묘한 과정을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인 아나니아와 베드로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결론을 맺으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시고,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자세로 일상을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우리의 모든 예배, 기도, 섬김,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감할 때 신앙의 깊이가 달라진다.

장재형 목사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선언과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한 고넬료의 자세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키고자 한다. 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전장’에서 펼쳐지는 것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보다 담대해지고, 감사하게 되고, 겸손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더욱 집중하며 그분의 음성에 민감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는 순종으로 동참하는 사역 방식을 몸소 체득하도록, 성경 본문(특히 사도행전)과 교회 역사,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사역적 과제들을 계속 연결해 보라고 도전한다. 그러면 교회의 예배와 선교,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 새로운 차원의 부흥과 기적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예수님이 보여 주신“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삶”의 길이며, 사도행전 9~10장에 기록된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이 사실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장(행 9장, 행 10장)을 관통하는 공통 분모는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시고,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이 기도와 순종으로 응답할 때 구원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펼쳐진다”는 진리다. 사울의 회심과 아나니아의 사역, 고넬료의 기도와 베드로의 환상은 모두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 역시 동일한 원리를 붙들고 살아가야 함을, 장재형 목사는 열정적으로 호소한다.

결국 결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하신다’는 확신 위에 선다. 우리가 이 확신을 품고, “하나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기대하며 기도할 때,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마땅히 만나야 할 사람에게로, 가야 할 자리로, 순종의 길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 길을 갈 때,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역사’가 다시금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믿는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이 단지 1세기에만 해당하는 제한된 진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영적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고넬료의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말도, 단지 그가 베드로에게 했던 환영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예배와 말씀, 선교 현장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마음가짐임을 배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자’가 될 때,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거룩한 교감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관념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능력’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은 결국 교회를 세우고, 가정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며, 영혼들을 구원하는 길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성령의 시대”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우리의 동역’을 한 편의 큰 드라마로 비유한다. 어떤 무대에선 우리가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성삼위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쓰시는 배우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우는 연출자의 지시에 민감하고, 대본에 집중하며, 연기에 헌신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음성을 따라 움직일 때, 사울과 고넬료가 온전한 ‘역할’을 감당해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듯, 우리도 우리가 속한 시대와 공동체 안에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선언,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장재형 목사는 기도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을 표한다. 그리고 그 확신 위에, 매일의 기도를 통해, 순간순간의 결정을 통해,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장재형목사는 독려한다.

요한복음 5장 17절과 사도행전 9~10장을 통해 장재형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크고 작은 일을 할 때마다, 그 모든 삶의 배후에는 이미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 섭리와 부르심 속으로 초청하시며, “내가 이미 아나니아를 준비했고, 사울을 부르듯, 고넬료를 준비했고,베드로를 보내듯, 오늘 너희도 그 동역의 길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음성에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예배와 헌신으로 응답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이전과 다른 차원의 믿음과 사역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넬료의 고백을 삶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강조해 온, 복음적이고도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의 실제적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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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 – 장재형목사

1.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성령 시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신 구원의 경륜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이어져 온 크고도 놀라운 계획이다. 창조 시부터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창 1:26), 그를 온전한 교제로 초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예비하셨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강조하며, 이것이 곧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자 인류가 궁극적으로 붙들어야 할 진리라고 가르쳐 왔다. 특히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흐름이 바로‘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와 영원히 교제하시려는 계획’이라는 점을 늘 상기시키며, 그 계획 안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적 태도를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곧 “창조-타락-구원-완성”의 큰 틀로 정리된다고 설파한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계를 지으시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으나, 인류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약속은 결코 파기되지 않았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심으로써 구원의 도구가될 선민을 세우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축소판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사역은 장차 오실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과정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나 배반, 심지어는 그들이 메시야를 온전히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한 사건들조차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경륜 안에 포함된 역사라고 설명한다.

그 구원 계획의 정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며,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로 이어진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자 구원의 결정적 사건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절대적이라고 역설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흘리심으로써 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으며, 부활을 통해 사망의 권세가 무력화되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에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의 정수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부활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대, 즉 성령 시대를 크게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심으로, 이제 교회는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된다. 이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며, 이 사건을 통해 초대교회는 새로운 능력과 담대함을 얻게 된다. 그들은 이전까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잡혀 죽으시자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통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히 복음을선포하는 자들로 변화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가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의 탄생이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영적인 권능을 얻은 사도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교회를 세워 나간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도행전의 출발 지점이 신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단지 율법이나 의식으로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성령을 받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증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확증이 바로 부활 신앙과 구원의 확신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능력의 뿌리가 된다.

바로 이러한 성령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회복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믿고, 그분과 연합되었을 때, 성령은 죄의 굴레와 세상의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드러날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서로 나누며, 박해에도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과 부활 신앙이었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구속사(救贖史)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바로 이런 성령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여러 문제와 갈등에직면했을 때, 과연 초대교회가 가졌던 동일한 능력, 동일한 메시지,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을 모으고, 활동을 열심히 하는 공간이 아니라, 성령의 시대에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몸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부활이 가져다준 구원의 능력이 세상 곳곳에 선포되고,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성령 시대의 개막은 개인의 변화만을 말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역사가 내적 회복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의탄생과 번영을 가져오며, 결국 그 영향력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까지 퍼져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역사상 교회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기는 언제나 성령의 강한 역사와 더불어 말씀 중심, 회개 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굳건히 서 있던 때였다는 것이다. 그 점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 과제임을 설파한다.

2.회개와 세례, 그리고 부활 신앙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중요한 핵심 주제는 ‘회개’와 ‘세례’, 그리고 ‘부활 신앙’이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가 바로 이러한 주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을 죽인 죄를 자각하고 “이제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는 절박한 질문을 했던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구원의 핵심 질서이며 교회의 기초적가르침이다.

장재형목사는 ‘회개’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가장 근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회개란 단순히 과거에 저질렀던 자범죄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통감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는 전적인방향 전환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람들 사이에 “회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주 오가는 것은, 회개를 막연히 ‘눈물과 애통으로 죄를 씻는 과정’쯤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회개는 단지 감정적인 울음이나 자기연민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주님 중심으로 삶의 주도권을 옮기는 실천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외침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돌이키라”고 외쳤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며 외친 이유,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 선언하신 까닭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회개는 구원의 출발점이자, 천국을 맞이하는 문을 여는 열쇠이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을받으라”고 외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회개에 이어서 베드로가 선포한 것은 바로 세례이다. 장재형목사는 초대교회가 성령을 통해 시작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공동체에 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례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 곧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의 예식과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임재가 함께 작용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나의 옛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 그리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동시에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존재로서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세례는 단지 종교 행사나 가입 의식이 아니라, 회개와 함께 거듭난 영혼이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고” (고전 6:17), 세상과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가 ‘부활 신앙’이다. 장재형목사는 부활 신앙이야말로 모든 성도가 붙들어야 할 신앙의 핵심이라고 여러 차례 설교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신앙, 곧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무너졌음을 확신하는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단지 고상한 가르침이나 도덕적 윤리로 머물렀을 것이며,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죽지 않는다”(요 11:25-26)는 약속이 성취되었다.

장재형목사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곧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실패나 고난, 심지어 죽음조차도 궁극적 패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바로 이 부활 신앙을 지녔기에 감옥이나 핍박, 순교의 위협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과 무력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영역, 즉 부활의 능력 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 성도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가르친다. 우리의 삶이 때로 무너지고, 실패하고, 아픔을 겪을 수 있어도,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주님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붙들고 일어날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부활 신앙이 단지 죽고 난 후의 영생 문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매일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초대한다. 즉, 영적으로 죽어 있던 우리를 다시 살려 내는 은혜의 능력, 삶 속에서 여러 번의 ‘소생’과 ‘기적’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능력이 바로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내적 회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와 사회, 문화 전반이 수없이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부활’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 즉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와약속이 결코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매순간 되살려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재형목사는 결국 회개와 세례, 그리고 부활 신앙이 하나의 흐름 안에서 연결됨을 재차 강조한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문이고, 세례는 그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새 생명으로 거듭났음을 고백하는 예식이며, 그 모든 과정의 완성은 부활 신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단지 교리적 동의나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작용해야만 진정한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

3. 초대교회의 역사와 장재형목사의 사역

사도행전 2장 이후의 교회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어떻게 시작되고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기록이다. 회개와 세례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 더해지면서 교회는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공동체생활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의 표본을 보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초기 교회의 이야기가 결코 과거의 신화나 이상향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원형’이라고 말한다. 그 원형은 성령의 강권적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서로 나누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았다(행 2:44-45). 이것은 단순히 착한일을 하는 차원을 넘어,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실제적 모습이었다. 교회가 세워지고, 말씀을 듣고, 함께 예배하며, 모든 것을 통용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일이었고, 성령의 역사는 날마다그 수를 더하여 갔다(행 2:47). 박해와 위협, 정부 당국자들의 간섭과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담대한 복음 전파는멈추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오늘날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돌아봐야 할 참고점을 얻을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이 초대교회가 보여준 강력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로 앞서 언급된 회개, 세례, 부활 신앙, 성령 충만의 조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더욱 견고히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절대적 신뢰”다. 우리는 종종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나 갈등에 함몰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되게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역사의 주관자는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극히 작은 것일 뿐”이라고 자주 설교한다. 하지만 그 작고 보잘것없는 순종이성령의 능력과 결합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실로 놀라운 방법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러한 초대교회 정신, 그리고 부활 신앙과 구원 경륜에 대한 강조는 장재형목사의 사역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교회를이끌면서, 그리고 설교와 저술 활동을 통해 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이를 통해 시작된 성령의 시대”임을 알리고자 해 왔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공동체 생활이 사도행전 2장부터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모델을 재현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래서 예배나 목회 활동, 혹은 선교 사역을 함에 있어서 ‘복음의 본질’, 곧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회개와 세례, 성령의 임재 등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교회의 사명은 변화된 개인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강조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인간적 노력이나 프로그램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늘 설파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모든 사역과 활동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지혜, 그리고 부활 신앙에 기초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세상적 운영 논리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고, 복음을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역을 전개해 왔다. 예배와 말씀 사역, 제자 훈련, 그리고 지역 사회를 향한 섬김과 봉사에서부터세계 선교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자”는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교인들에게 먼저철저한 회개와 세례, 그리고 부활 신앙의 확립이 필요함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와 세상 가운데서도 복음의 실제적 가치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증인’이 되도록 도전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인식이 분명해질 때, 자연스럽게 ‘공동체성’과 ‘사명감’이 회복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예배 공동체’인 동시에, 세상으로 파송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선교 공동체’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측면이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예배는 늘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드려져야 하고, 선교는 우리가 받은 은혜와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구체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이 원리는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는 교회의 사명이고,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라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땅에서 승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세속적 성공이나 세상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번영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이 회개하고, 세례 받고, 부활 신앙을 소유하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초대교회의 3천 명, 5천 명의 회심 사건은 어떤 대단한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적 방식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임재와 말씀 선포의능력이 만나 거두어진 열매였다(행 2:41, 4:4).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사람을 모으는 데 급급하기보다, 진정한 회심과 제자도를 양육하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여 공동체의 수만 늘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높이고, 진정한 회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삶이 변화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사명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추구하는 신앙의 뿌리와 목회적 방향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델에 기초한다. 그는 사도행전 1~2장에서보여지는 성령 강림과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2장 말미에 소개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생활을 현대 교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근본 원리가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뢰, 부활 신앙, 성령 충만, 공동체적 교제”임을 수없이 되풀이해 왔다. 이 원리에 충실한 교회가 되려면, 교회 지도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거듭난 뒤, 부활 신앙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자신이 섬기고 이끌어 온 필그림 교회(또는 그가 사역하는 다양한 교회나 공동체)를 예로 들며, 하나님께서 주신아름다운 예배당과 시설이 단지 물리적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부활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야 진정한 축복이 된다고 설교한다. 교회의 외형이나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예배와 말씀, 회개와 기도,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전도의 열정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성령 공동체’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늘 예배를 준비하며, 교인들의 삶에서 회개가 실제로 일어나고, 세례와 성령 체험이 구체화되며, 부활 신앙이 삶의 매 순간에 동력이 되도록 제자훈련과 말씀 양육에 힘쓰도록 독려해 왔다.

이렇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그 능력으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될 때,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초대교회가 각 지역에서 칭송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교회에 더해진 것은(행2:47), 그들이 가진 풍부한 재정이나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고, 부활 신앙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이기며,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세상보다 한 단계 높은 도덕이나 윤리를 펼치는 곳이 아니라,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을 실제로 체험한 증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성령의 흐름”을 강조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르는 과정(행 1:8)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필연적확장이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중심이었지만, 점차적으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등장하며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런전개는 우리에게 “복음의 보편성”과 “선교의 긴급성”을 일깨우며, 현대의 교회도 동일한 도전을 받아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복음은 결코 특정 민족이나 문화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 교회는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할사명을 받았음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행전의 기록은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는가?”를 다룬 역사이며, 이 역사 가운데 성도가 해야 할 역할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리를 가르치며,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 교회가 배워야 할 핵심 가치를 정리해 왔다. 그리고 이 핵심 가치들을 ‘구원 계획, 회개와 세례, 부활 신앙,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로 묶어 설파한다.

현대 교회가 여러 도전과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장재형목사는 늘 사도행전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교회가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부활 신앙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회개와 성령 체험을 가볍게 여겨 버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교회 갱신의 열쇠는 초대교회가 가졌던 열정을 재발견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령의 능력을믿으며, 부활 신앙으로 담대하게 살겠다는 결단에 달려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으로, 무기력 속에서 능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장재형목사의 사역과 가르침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회개와 세례, 부활 신앙, 성령의 능력에 있다. 그는 이를 통해 교회가 다시금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온세상을 향한 선교의 대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역설한다.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식이나 제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체험한 성령의 역사와 부활 신앙의 능력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한 ‘회개하라, 세례를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는 메시지는 곧 성경 전반에 흐르는 구원의 초대이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그리스도인의삶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교회가 이 기둥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고장재형목사는 결론 내린다.

결국 초대교회의 핵심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본질은 이렇다. 첫째,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성령을 받음으로써 부활 신앙의 담대함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넷째,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전인류와 전 우주적 차원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믿고, 마지막 때까지 신실함으로 동참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와 같은 메시지를 다양한 설교와 저서, 그리고 공동체 사역과 선교 활동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의 핵심 사역은 다름 아닌 “십자가 복음과 부활 신앙, 성령의 능력을 통한 교회의 회복”이며, 이는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는 초대교회의정신과 동일한 맥락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어주심을 당하셨다”(행 2:23)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을지라도, 그분은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고, 이제는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워 가신다. 이 놀라운 역사를 믿고따르는 것이 곧 교회의 본질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주적이며, 모든 민족과 사람에게 열려 있다. 둘째, 죄 많은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셋째,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회개와 세례, 그리고 성령 체험이 필수적이다. 넷째,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을 두려움 없이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자, 죽음을 넘어서는 궁극적 소망이다. 다섯째, 교회는 이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의공동체이며,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 시대’의 증인들이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모델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사도행전 강해의 핵심은 결코 복잡하거나 난해한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인간의 타락과 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회개와 세례, 성령의 임재,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선교 사명이다. 이것들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복음의 본질’이며, 초대교회는 이 본질을 실제로 경험하고 실천했다. 따라서 현대 교회도 이러한 성령의 시대를 다시금 체험하고, 부활 신앙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며,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담대하게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추구하는 비전이며,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메시지다.

오늘도 교회는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화려하고 인원이 많더라도, 초대교회가 보여준 하나님의구원 경륜, 회개, 세례, 부활 신앙, 성령 충만의 본질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공동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환경과 박해 속에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회개와 세례, 성령 체험을 통해 부활 신앙을 견고히 세우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망 권세조차도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2천 년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 전체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견고히 설 수 있는 근거와 희망이 있으며, 이 진리를 굳게 붙들며 나아가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장재형목사는 궁극적으로 “보혈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이 선포될 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던 초대교회의 역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역설한다. 그 초대교회의 역사는 교회사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 흐름에 동참하여 회개와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거룩하게 세워 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고, 사도행전적 부흥이며, 교회의 본질적 존재 이유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치며, 우리 모두가 시대와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하늘의 신앙을 붙들어 승리하길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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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신비와 교회의 하나됨- 장재형목사

1. 에베소서 1-3장의 교리와 복음의 신비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영적인 진리와 권면을 보내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에베소서를 ‘옥중서신’ 가운데서도 정수(精髓)로 여기며,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높은 신학적 통찰과 실천적 당부가 담겼다고 평가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 역시 본서를 깊이 연구하며, 여기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와 삼위일체적 신론을 설교 및 강의에서 자주 강조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에베소서는 1장부터 3장까지가 주로 ‘교리’ 혹은 ‘복음의 신비’와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갖고 계셨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선포하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설명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까지는 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긴 복음 찬양이라고 불리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택하심, 구속,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이 체계적으로 드러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삼위일체적 구원의 역사, 즉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성자 예수님의 속량,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인을 치심으로써 구원이 보장된다는 위대한 복음의 구도를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두고, “교회가 붙들어야 할 가장 심오한 복음의 정수”라며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그 소망의 실체를 명확히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그저 현세적 이익이나개인적 안녕을 초월하여,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영광스러운 초청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장재형목사”도 여기서 말하는 ‘부르심의 소망’을 주제로 여러 차례 설교하면서, 성도가 이 땅에서 그저 믿음 생활만 하는것이 아니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음을 늘 강조하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유대인이었는지 이방인이었는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로를 갈라놓던 율법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누구든지 사회적 지위나과거의 배경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여러 설교에서 힘 있게 전해 왔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막힌 담’을 헐어내신 그리스도의 구원은, 신분과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복음의 광범위한 능력을 시사합니다.

에베소서 3장에 이르면, 바울은 자신이 맡은 사도로서의 직무를 ‘비밀을 맡은 자’로 설명하며,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큰 계획 가운데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내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라고 고백하면서도, simultaneously(동시에) “모든 족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신적 섭리를 설파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4절 이하에서 웅장한 기도를 드리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기원합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히 지적(知的)으로 아는 차원을 넘어, 삶 속에서 체험되고 공유되어야 함을 강조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사랑에 뿌리를 내린 신자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충만해질 수 있는지 설명하는 부분을, 참된 복음의 동력이자 교회의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에베소서의 앞부분(1-3장)은 교리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 역사의 본질,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성령의 내주, 그리고 율법 아래에서 차별받고 소외받던 이방인들조차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상속자가 된다는 탁월한 복음적 선언이 펼쳐집니다. 바울은 이를 ‘복음의 신비’라고 부르며, 모든 성도가 한 몸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함께 성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교리 혹은 신비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4장 이후에 제시되는 윤리적 권면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늘 설교에서 말하듯, 신앙의 윤리가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얕은 결의가 아니라, 구원의 도그마(dogma)가 가져다주는 권능 위에 서 있어야 비로소 생명력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에베소서 4장에서의 윤리적 권면과 핵심 덕목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 이르러, 그토록 웅장하고 고상했던 복음의 신비를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교리에 이어지는 윤리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엡 4:1)라고 시작하며,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직접적인 교훈을 줍니다. 특별히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가 교리를 넘어 실제 삶의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는 점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에 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주석 강의에서 말하곤 합니다.

먼저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 4:1)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르심을 입은 부름’이란, 1장에서언급한 “그 부르심의 소망”과 직접 연결됩니다. 바울은 신앙인이 자신이 받은 소명을 잊지 않고, 그 고귀한 복음의 목적에 맞게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부르심’(calling)과 ‘직업’(vocation)을 연결 지어, 신자가 각자 살아가는 사회적 위치와 일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여기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자주 설파합니다. 위그노(Huguenot) 공동체 사례를 들어설명하곤 하는데, 그들은 경건하고 신실하며, 핍박을 당해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사명으로 알고 성실히 감당함으로써 산업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콜링(calling)이 있으며, 이를 합당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장 2절에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안에서의 용납’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동안거짓된 교리나 자칭 사도라는 자들을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칭찬받았지만, 계시록 2장에서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지키는 투쟁 속에서 점차 사랑의 순수함과 겸손, 온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서 4장과 관련하여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강해야 한다는 명제를 부인할 수 없지만, 그 강함은 결코 세상적인 방식의 권력 지향이나 독선에 기반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합니다. 구체적으로 겸손과 온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핵심적 인격이고,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가르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예수님의 자기 비하( 자기 낮춤)와 순종,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철저한 희생이 곧 온유와 겸손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에베소 교인들이 본받기를 원했으며,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참음’ 역시 분열과 갈등 속에서 이기는 무기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연약함이 있기 마련이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교회 내에서 고기 문제, 절기 문제 등으로 갈등하는 형제를 대할 때,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권면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용납이란 그저 눈 감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그의 아픔과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용납은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속적으로 성장해가는 데 필수적인 태도”라고 설명하면서, 교회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들추어 비난하기보다, 함께 기도하고 보듬어주며 일으켜세우는 노력이 사랑의 실천임을 역설합니다.

이 모든 덕목의 목적은 결국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하는데, 여기에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곧교회는 인간이 조직적으로 만들어내는 단순 집단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 신령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를 찢어버리는 것은, 곧 주님의 몸을 찢는 죄악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분열이 아닌 연합의 길을 걷는 것이 복음의핵심 정신이며, 교회 본연의 모습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수차례 설교에서 “주님의 몸은 이미 하나 되어 있는데, 그걸 지키지못하는 인간적 분쟁이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엡 4:4)라고 선언합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은 곧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한 분이며, 성령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엡 4:5). 교회가 갈라지고 찢어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 “하나” 되신 하나님을 훼손하는 행위와 같다는 엄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삼위일체하나님의 통일성을 특별히 주목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 자체가 공동체적 존재, 곧 성부·성자·성령으로 영원히 하나이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그분을 닮아가는 교회라면 당연히 하나 됨을 지향해야 하고, 겸손과 온유, 사랑과 오래 참음으로 그것을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초월적 차원에서 동시에 임재하시며, 온 우주에 내재하시는 삼위일체하나님을 선언하는 아주 깊은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고,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로 성장하려면,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대목을 설교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넘어지고 방황할 때, 우리의 신론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초월과 내재, 그리고 역사 가운데 드러나시는 섭리를 인식할 때, 비로소 교회적 삶이 분열이 아닌 연합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하는 “만유 위에 계시고(Above all) 만유를 통일하시고(Through all) 만유 안에 계시는(In all) 하나님” 개념은,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론을 제시합니다. 초월신론(Transcendence)과 내재신론(Immanence), 나아가 역사적 과정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까지 함께 아우르는 이 표현이, 교회가 “하나”라는 실체를 든든히 세우는 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들이 예배할 때, 저 하늘 위에만 계신 초월적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쪽 극단에 치우쳐도 안 되고, 반대로 내 안에서 체험되는 하나님만 고집하여 공동체성을 무시해도 안 되며,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 초월과 내재, 그리고 역사 속 현현을 동시에 이루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교회가 균형 잡힌 신앙공동체로 서게된다.”

결국 에베소서 4장의 윤리적 권면의 핵심은, 이전 장(1-3장)에서 선포된 복음의 신비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크고 놀라운 부르심이 있고,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려면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안에서의 용납이 필요합니다. 또한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교회 공동체를 힘써 지키는 것이, 복음 안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삶의 열매라는 점을, 바울 사도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기서 교회론의 핵심은 “하나 됨”이라면서, 우리가 각각의 재능과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3. 교회의 하나 됨과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

교회의 하나 됨(Unity)은 에베소서에서 가장 강조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바울은 “주의 몸은 하나이며, 성령도하나이고,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니, 하나님도 하나이시다”(엡 4:4-6)고 역설합니다. 초대 교회는 수많은 박해와 내외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 ‘하나 되심’에 대한 진리를 붙들고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교회사 전체를 살펴보면, 인간적인 권력 다툼, 신학적 해석 차이, 잘못된 이단 교리 등으로 인해 교회가 끊임없이 분열해 온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전 세계로 확장되고 복음이 끊임없이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삼위일체적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선언과 일치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교회의 하나 됨을 설파할 때,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반드시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목전에 두고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 됨이 단순한교인 간의 외적 친목이나 행사 차원의 연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이신 것같이, 교회도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것이 곧 교회의 하나 됨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이 내포하고 있는 “만유의 아버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일치를 통찰하게 해 줍니다. 구약 시절 유대인들은 ‘여호와는 한 분’(신 6:4)이라는 엄격한 유일신 사상을 지녔고, 이방 종교의 다신론과 극명히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곧 하나님 자신”임이 드러났고, 또한 성령님이 “주와 같은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 계시됨으로써, 교회는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성부·성자·성령 세 위(位)의 하나’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삼위일체적 이해가 에베소서 4장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엡 4:4-5)에서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말하며“성령이 하나이니” “주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성령·성자·성부의 이름을 연이어 언급하듯, 바울은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나 되심”을 다시금 각인시키며, 교회도 그 하나님을 닮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삼위일체론을 기초로 한 교회론”이라고 설명하며, 교회가 만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분쟁이나 이기적 파벌 싸움은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나아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초월적(Transcendent)이면서 동시에 내재적(Immanent)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시면서, 한편으로는 교회와 역사, 그리고 개인의 심령에가까이 임재하십니다. 이러한 신론이 바로 믿음의 토대가 될 때, 교회 안에서의 윤리적 열매들이 풍성히 맺힙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자기 앞에 있는 이웃이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지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과오해가 생겨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용납하는 실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점을 강조하며, “특정 교단이나 신학적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는다면, 근본적으로 서로 받아들이고 용납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이렇게 에베소서는 교회의 일치를 논하면서, 단순히 “분열하지 말라”는 도덕적 수준의 요구를 넘어서, 삼위일체적 신앙고백과구원론적 토대 위에 실천을 세웁니다. 교회는 주께서 부어 주신 은사들을 따라(엡 4:7-12), 서로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장성한분량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기 때문에, 각 지체가 다른 지체를 수종 들고 보완하고 세워나가는 것이 교회적 삶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6절에는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교인 개개인을 ‘유기적 지체’로 비유하며, 모두가 제 역할을 감당할 때 교회가 성장할 수 있지만, 어떤 부위가 교만이나 무관심으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몸 전체에 병리적 징후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에베소서 4장이 제시하는 교회의 하나 됨은, 단순히 교회 내 분열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룩하고 주권적인 연합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의 성화와 공동체의 영적 성숙이 함께 진행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 됨을 경험할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서로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온유함으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며, 오래 참음으로 갈등을 이겨 내고,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공동체가 세상에 줄 충격과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와 다원주의 문화가 팽배하여, 교회의 “하나 됨”이 더욱 중요한 시대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계속 분열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원리가 만연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의 메시지는 1세기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21세기 교회에도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며, 만유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한다면, 교회가 서로를 정죄하고 찢는 행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워진“한 새 사람”(엡 2:15)의 구성원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이러한 에베소서 4장의 메시지를 접목하여, 구체적인 공동체 적용 방안을 제시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교회 내에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화하고, 양보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실제 사례를 들어 가르칩니다. 또한 사회적 갈등 현장에 교회가 참여할 때, 힘이나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십자가 정신에 입각하여 겸손과 온유로 섬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도록 독려합니다. 결국 에베소서 4장은,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열정적 권면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 살아가라는 강력한 초대(招待)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에베소서 1-3장이 복음의 신비와 교리를 웅장하게 펼쳐놓았다면, 4장 이후는 그 복음의 실제적 열매로서 “교회의 일치와 성도 간의 사랑 실천”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체가 지니고 계신 “하나 됨”의 본질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명쾌하게 선포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붙들고 세상 가운데 나아갈 때, 진정한 화해와 연합,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공동체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도 이 점을 거듭 강조하며, 교회가분열과 대립이 아닌 용납과 용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연합을 이룰 때, 복음의 능력이 사회 전 영역에 강력하게 퍼져나갈 수있음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메시지는 “하나 됨”과 “사랑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이는 교리와 윤리가긴밀히 연결된 상태에서, 삼위일체적 신론 위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도 이 위대한 비전을 제시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효한 지침을 남겼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무너져 가는 이들을치유하고 품어주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을 끊임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계시록에서 책망받았듯이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진리를 수호하는 투쟁 속에서도 헛된 열심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사랑, 교리와 윤리, 신앙고백과 실천을 균형 잡힌 모습으로 구현하는 일이야말로, 에베소서 전체의 메시지를받아들이는 교회의 참된 과제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에서 꾸준히 역설해 왔듯,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 다른 배경, 성격, 재능, 상황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을 때,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과 섬김, 사랑과 화해가 필요하지만, 이는 주님이 먼저 보여주신 길이며, 교회가 따라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4장을 통해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본질적 메시지이며, 동시에 교회가 오늘날 더욱 붙들어야 할 영적 비전입니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 장재형목사

1.  고린도후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

고린도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의 내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편지로 알려져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갈등과 눈물을 담아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그 편지는 현재 우리 손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안에 담긴 바울의 표현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 교회 상황뿐 아니라 바울이 겪은 환난과 고통, 그리고 그 가운데 경험한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베소에서 겪은 극심한 박해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에 이른 바울은, 자신이 인간적으로 전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고린도후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이 메시지가 지닌 의의는 과거 고린도 교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애쓴 장면들, 교회 내부의 분열과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단호히 대처한 장면들, 그리고 환난 중에도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간 모습은 오늘의 교회가 경험하는 현실과 깊이 맞닿아 있다. 교회 안팎에서 물질주의, 세속화, 그리고 교리를 흐리는 온갖 도전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였고,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오직 부활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라는 단 하나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의 사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형목사는 국내외에서 교회 개척, 미디어 사역, 선교·교육 활동 등을 펼쳐 왔으며, 그 사역 현장에서 여러 형태의 도전을 마주했다. 시대가 달라졌기에 당시 고린도 교회가 겪은 문제와 현대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가 세부 양상에서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 문명권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온갖 문화적 혼합주의와 세속적 유혹이 교회에 들어와 분열을 야기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물질주의와 세속 가치, 그리고 온갖 미디어를 통해 들어오는 왜곡된 정보로 인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그럴수록 지도자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거짓 교사나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교회를 붙들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며, 행위나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현대 교회의 지도자 또한 오직 복음 자체를 철저히 지키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복음의 순수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린도후서의 문제의식과 만난다. 교회가 외적으로 번창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더라도, 복음 자체가 희미해지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울이 편지 곳곳에서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면서 “나는 약한 가운데서 오히려 강하다”고 천명한 것은, 세상적 기준에 의하면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언변이나 세상적 성공을 사도의 증거로 삼으려 했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고난과 약함을 통해 진정한 사도직의 표지를 증명해 냈다. 이 패턴은 현대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준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아무리 크게 확장되어도, 지도자가 세상적 성공만을 자랑한다면 교회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고,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교회를 온전히 믿음 위에 세울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 권위가 서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몸소 보여 준 셈이다.

특히 바울이 에베소와 마게도냐, 그리고 고린도를 오가며 겪었던 환난은 그의 사도직을 무너뜨리려는 세력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고린도후서에는 그 환난이 얼마나 크고 심각했는지, 그로 인해 바울이 살 소망조차 끊어졌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 바울은 한계를 느꼈고, 자기를 의뢰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는 현대 교회와 성도, 그리고 목회 지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원리다. 목회나 선교 사역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 인간적 지혜와 수단에만 의존한다면 쉽게 한계에 부딪친다. 이때야말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실해지고, 그 믿음을 통해 복음 사역이 새로운 확장을 맞이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의 수많은 고난을 길게 나열하면서도,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께 붙들린 자임을 증명하는 도구였다고 말한다. 사도직의 권위를 저마다 주장하던 거짓 교사들은 화려한 언변이나 세속적 배경을 자랑했지만, 바울의 진정한 사도적 표시는 오히려 “고난과 환난 속에서 버림받지 않고 주님의 능력 안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장재형목사가 국내외에서 사역해 온 여러 과정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 언어, 재정, 행정적 제약, 심지어 이단이나 극단적 비판자의 공격 등 다양한 형태의 도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교육, 미디어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바울이 보여 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함을 붙드는” 태도와 닮은 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여러 목회자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사역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고린도후서가 말하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의 동일한 체험이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에서도 반복된다는 뜻이다. 한편, 고린도후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가 “교회 내 갈등 해결”과 “거짓 교사 분별”인데, 이것도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교회도 갈등 없이 순탄할 수는 없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신학적·정치적·관계적 이슈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갈등을 맞닥뜨렸을 때, 바울이 보여 준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교리를 왜곡하거나 복음을 훼손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한다. 둘째, 교회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호소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해야 교회가 회복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넘치는 사랑을 갖고 있는지 알게 하려 함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책망만으로 상대방을 조각내고 버리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되 그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목회 현장이나 여러 매체에서 갈등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복음에 해가 되거나, 교회 공동체를 심각하게 무너뜨리는 가르침이라면 결코 묵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눈물의 편지”가 보여 주듯,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이 사라지면 안 된다. 책망은 결국 교회를 회복하고 세우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고린도후서 전편을 관통한다.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 드러낸 역사적·신학적 배경과 핵심 메시지는, 오늘날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 더 나아가 모든 성도에게 여전히 유효한 원리를 제공한다. 당시 고린도는 상업이 발달하고 우상 숭배 문화가 만연했으며, 도덕적으로도 문란한 풍조가 깃들어 있었다. 교회 안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거나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 분열을 일으켰다. 이에 바울은 편지로만 대응한 게 아니라, 디모데나 디도를 파송하고, 직접 방문을 계획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고난과 눈물을 가감 없이 교회에 전했다. 그 처절한 노력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교회를 바로 세우고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아무리 사랑이 넘친다 해도 복음의 본질이 흔들리면 무너지고, 아무리 교리가 단단하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거친 방식으로 사람들을 몰아내는 부작용을 낳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 두 가지를 함께 지켜 낸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낸 고린도전서를 통해 교회를 먼저 권면했다가, “눈물의 편지”를 보낸 뒤 마게도냐 지방에서 고린도후서를 작성했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이지만, 어디서 편지를 썼든 중요한 것은 그의 심정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즉 에베소에서의 큰 박해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우상 숭배 세력과의 충돌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면서 겪은 영적 싸움이 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런데 그 지점이야말로 하나님이 바울에게 “네가 나를 의지하면 내가 너를 건져 낼 것이고, 더 큰 일에 쓰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다시금 위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교회 내 죄와 분열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린도교회 일부가 회개하고 태도를 고치기 시작한다는 희소식을 디도를 통해 듣게 되면서, 바울은 한편으로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 남아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고를 보낸다. 이처럼 눈물과 기쁨, 환난과 위로, 약함과 강함이 교차하는 것이 고린도후서가 가진 매력이며, 동시에 거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이 녹아 있다.

이 신학은 결국 “부활 신앙”에 근거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 말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능력이나 계획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죽음까지도 뒤엎으실 수 있는 능력자라는 뜻이다. 자기 능력이나 지혜를 아무리 내세워 봐도, 극심한 위기 앞에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일하시면,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세련된 언변을 가졌다 해도, 교회가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뢰한다”라는 믿음을 놓쳐 버리면, 잠깐은 성장하는 듯 보여도 위기가 닥쳤을 때 휘청거리고 만다. 반대로 성장이나 외적 성공이 더뎌 보인다 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장재형목사가 국내외에서 펼쳐 온 사역, 특히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 개척이나 다양한 미디어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부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다룬 예루살렘 구제 헌금 이야기도 현대 교회에 여전히 유효한 주제다. 이는 재정 문제나 헌금의 기술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 간 연대와 사랑, 영적 교제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보여 주는 모범 사례다. 고린도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를 보고 도전을 받고, 다시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며 하나의 그리스도 몸을 이룬다는 이 그림은, 오늘날에도 지역과 국가, 교단을 초월해 교회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국가에 걸쳐 교회들을 세우고,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사역한다면, 그 관계가 단순히 ‘조직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교회 연대’를 구현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 즉, 재정적·인적 자원을 서로 보충해 주고, 약한 교회를 세워 주며, 환난당한 교회를collectively 돕는 것 자체가 복음이 지닌 힘을 실제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결국 고린도후서는 ‘환난 중에서 경험한 위로의 신학’,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 ‘거짓 교리와 맞서는 교리 수호’, ‘교회 분열을 치유하는 사랑과 진리의 병행’, 그리고 ‘교회 간 연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실천’ 등 다양한 면모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보석 같은 서신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 이미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윤리적 타락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자 더욱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의 편지”를 썼고, 어느 정도 회개 소식을 들은 뒤 다시금 고린도후서를 써서 확실히 방향을 잡아 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이 흘린 눈물과 겪은 환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의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그 환난이 바울에게는 ‘사형선고’ 같았지만, 그것이 바울을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했으며, 결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와 유사한 원리가 현대 교회나 목회자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재현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고린도후서가 결코 과거의 교회 문제만을 다룬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오늘날에도 다양한 위기 상황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 있다. 경제적·정치적 제약이나, 세속 문화의 범람, 혹은 내부적인 반목으로 인해 교회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는 바울의 고백이 적실한 권면으로 다가온다. 바울이 들려준 이 신앙 고백은 단순히 위기를 극복하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삶으로 체득한 사도적 선포다. 그리고 이 선포를 붙든 교회와 지도자는, 바울이 겪은 환난을 이해하고, 또 바울이 경험한 은혜를 공유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세워 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고린도후서는 여러 장에 걸쳐 바울의 심정을 폭넓게 담고 있지만, 핵심은 “인간적인 자랑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자”라는 점으로 수렴된다. 여기에 더해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교회를 살리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현대 교회에 몸담은 성도들이나 목회자들도, 자신이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이 무조건 불행이 아니라, 때로는 깊은 은혜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라고 고백했다. 이는 그의 고난이 곧 교회에 쏟아지는 위로와 은혜의 매개가 되었다는 뜻이다. 교회가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고난당하는 이에게 함께 울면서도 교리의 순수함을 지키도록 노력할 때,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고린도후서는 교회와 성도가 당대의 세속화와 내부 혼란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영적 지침서다. 바울이 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사역을 이어 가는 이들이 곧 교회를 지키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역자들은 이 바울의 심정과 고백을 공유하며,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과 장재형목사의 사역적 연관성을 함께 살필 때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2. 현대 교회의 적용과 목회적 과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은 다양하다. 세속화와 물질주의, 교회 내 분열, 무분별한 이단 침투,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등은 이미 잘 알려진 문제들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가 보여 주듯, 교회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러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교회를 붙드시는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교회가 정말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것인가”를 선택하느냐의 여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목회 원리와 장재형목사의 사역이 만나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직면했던 거짓 교사들은, 때로는 율법주의를 강조하거나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함으로써 교회를 혼돈에 빠뜨렸다. 이처럼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가르침이 들어오면 교회는 쉽게 분열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핵심 교리가 흔들리는 일이 생긴다면 동일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미디어나 교육 사역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의 순수성”과 “바른 신학”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앙의 기초를 흐려 놓는 교리는 결코 허용될 수 없고,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신학적·영적 무장을 철저히 해야 한다. 바울은 왜 거짓 교사들의 말을 그렇게도 강하게 반박했을까. 그것이 교회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교회가 생존하려면, 즉 참된 의미로 존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둘째,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역설을 현대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성도와 지도자는 환난을 ‘피해야 할 대상’ 혹은 ‘가능하면 없어야 할 일’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상황에서 바울은 되레 “이제야말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그 결과 그는 더 담대하게 교회를 돌보고 복음을 지키며, 오히려 교회가 위기를 통해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개척 혹은 선교 사역의 장에서 맞닥뜨린 어려움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면 경제적 제약과 문화적 장벽이 따를 것이고, 미디어 사역을 하다 보면 각종 오해와 비판이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환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붙들게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더 깊은 영적 뿌리를 내리고 성도들이 믿음의 강함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교회의 지도자는 바울이 그랬듯이 “약함 속에서 강함”을 나타내야 한다. 바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약했고, 말도 능변가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자주 능욕과 박해를 당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세속적 장점이나 배경,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며 바울을 깎아내리려 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라고 강조하며,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한다. 현대 교회 지도자가 교회 내외부의 문제를 다뤄야 할 때, 만약 세상적 기준에만 집착하여 재정적 풍요나 조직의 규모를 과시한다면, 교회 본질과 멀어질 위험이 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진정으로 고린도후서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목회자들이라면, 약함을 인정하고, 그 약함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한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는 결국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가능하다. 바울의 이 강조점은 오늘날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통한다.

넷째, 교회 내 갈등이 생겼을 때 책망과 사랑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보이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눈물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교회 안의 죄나 불의를 단호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며, 엄중한 책망 뒤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밝힌다. 현대 교회에서도 갈등이 생겼을 때, 무조건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대충 타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들면, 결국 교리적 타협이 일어나고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 반면에 사랑 없이 강압적 방식으로만 몰아붙이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깊어져서 공동체가 깨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바울이 보여 준 모범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를 지키되, 상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한국과 해외 각지의 사역지에서 여러 갈등을 만났을 것이고, 그때마다 고린도후서가 보여 준 이 ‘책망과 사랑’의 병행 원리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으려면, 잘못된 것을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교정 과정을 거쳐야 하며, 동시에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위로가 펼쳐져야 한다.

다섯째, 교회 간 연대와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예루살렘 구제 헌금을 권면하며,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라고 당부한다. 이는 단순한 모금 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 교회들이 ‘한 몸’임을 증명하는 영적 연대 행위다. 현대 교회들도 국내외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함께 선교와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국가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미디어나 교육을 통해 각 지역 교회가 필요한 자원을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러한 바울적 원리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코로나19 등 전 지구적 위기가 벌어지면서 교회 간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특정 교회가 고난에 빠졌을 때 다른 교회가 힘을 모아 도와주고, 한쪽에서 얻은 신학적 통찰이나 사역 노하우를 서로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고린도후서가 보여 준 교회 연대의 정신이다.

여섯째, 바울이 강조한 “위로의 신학”을 확장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돌보고, 함께 울며, 바울이 말한 “내가 받은 위로로 너희를 위로한다”라는 영적 상호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한 공동체적 위로는 감정적 위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의 위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도록 이끄는 능동적 역할을 한다. 교회가 병상 중에 있는 이들, 가정이 해체 위기에 놓인 이들, 경제적 파산을 겪는 이들, 심지어 신앙적 회의를 느끼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목회 현장이나 여러 미디어에서 간증과 말씀을 나눌 때, 그 내용 안에 ‘부활 신앙’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현대판 ‘위로의 신학’을 실천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일곱째, 교회 안에 거짓 교사나 잘못된 사상이 침투할 때 이를 제대로 분별하고 대처하는 일은 시대를 초월한 과제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졌던 근본 원인은, 사도 바울을 배척하면서 자신들의 사도성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바울의“연약한” 모습과 여러 어려움을 겪은 이력 등을 조롱하면서, 겉보기엔 더 뛰어나 보이는 말과 방식으로 성도들을 현혹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 약함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드러냈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 권위임을 밝혀냈다. 현대 교회도 교회 지도자를 폄하하고, 자신들이 가진 ‘새로운 지식’ ‘새로운 계시’를 내세워 성도들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늘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고린도후서가 준 교훈, 즉 “세속적 스펙이나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얼마나 진실하게 붙들고 있느냐”가 정통성과 권위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교회는 이 분별력을 키워야 하며, 성도들은 지도자의 언행이 성경과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여덟째, 교회가 실제 갈등을 해결하고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눈물로 쓴 편지”에 담긴 바울의 심정과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그저 권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내 말대로 해라”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했고, 잘못된 길을 걷는 이들을 혼냈지만, 동시에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며, 그 모든 책망의 동기가 사랑임을 밝혔다. 지도자가 교회의 분열이나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으려면, 회개를 촉구하되 그 과정을 통해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사람을 돌이키는 힘은 결국 복음에서 오며,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작동한다. 이 두 가치를 어떻게 균형 잡아 적용하느냐가 관건인데,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 균형을 잡아 가는 모습을 읽는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지도자들, 나아가 성도들도 갈등 상황에서 감정적 폭발로 치닫거나, 무조건 묵인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바울과 같은 인내심과 애통함, 그리고 진리 수호의 결연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아홉째,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한 대목은, 현대 교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지침이다. 교회를 건축하거나, 선교지를 개척하거나, 미디어 사역을 확장할 때, 인간적 계획이나 재정력만 바라보면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친다. 그러나 그 순간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 의존’으로 나아가면,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결국 교회가 ‘자기를 의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지도자 스스로가 먼저 그러한 영적 자세를 보여 줘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위험 요소를 감수하면서도 국내외에 선교 네트워크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조직력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복음이 지닌 힘을 전 세계 곳곳에 전하기 위한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무수한 어려움이 뒤따랐을 터이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이 사역이 인간적 수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굳건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열째, 고린도후서가 특정 시점에 쓰인 역사적 문서이면서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적용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신학적 깊이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겪은 ‘환난 중의 위로’라는 주제는, 욥기의 “고난받는 의인”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 주신 ‘십자가의 길’과도 연결된다. 예수님 또한 세상적 영광이나 세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다. 바울은 그 길을 뒤따르며, 자신의 삶에 적용했고, 고린도 교회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현대 교회도 교회 성장학이나 경영학, 혹은 마케팅 전략 등 다양한 방법론을 참고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교회의 근본 동력은 “십자가의 도”에 있고, “부활의 능력”에 있다. 고린도후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도 결국 이 지점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부활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면, 교회는 아무리 외연을 확장해도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열한째, 현대 교회가 직면한 미디어 환경도 고린도 교회 상황과 흡사한 면이 있다. 고린도인들이 헬라 철학이나 수사학에 심취해 바울을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낮게 평가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대중 매체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시대착오적이라 일컫고, 교회 지도자를 향해 ‘세상 흐름을 모른다’고 비판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 세상의 논리에 편승하기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했고, 그 결과로 공동체를 일으켜 세웠다. 장재형목사가 미디어 사역에 주력하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방식으로 대중적 관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십자가와 부활을 기둥 삼아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전달한다면, 그 자체가 현대판 고린도후서의 적용이 될 것이다. 미디어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일수록, 복음을 더욱 진실하고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당장에는 세련된 기법으로 포장된 콘텐츠보다 매력이 없어 보인다 해도, 결국 영혼을 살리는 능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열두째,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나 지도자의 실수, 재정적 투명성 이슈 등이 불거졌을 때도 고린도후서의 원리는 유효하다. 바울은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눈물의 편지”를 통해 그것을 지적했고, 회개를 호소했다. 교회는 잘못을 숨기거나 은폐하려 든다면 오히려 더 큰 위기에 빠진다. 그래서 ‘책망과 징계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고, 그때 바울이 제시한 틀은“사랑이 동기인 책망”이다. 철저히 드러내어 회개하게 하는 동시에, 회개한 사람을 다시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나 성도 모두 “오직 하나님 앞에 선다”라는 인식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사람이 두려워서, 혹은 조직의 체면을 지키려고 잘못을 덮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 교회는 더 큰 분열과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고린도 교회도 그런 위험에 처해 있었으나, 바울의 진심 어린 사랑과 단호함 덕분에 많은 부분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가 이 원리를 지킨다면, 오히려 환난이 올 때 교회가 정화되고 진리를 붙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열셋째, 바울이 고린도후서 전반에 걸쳐 말하는 ‘환난과 위로의 확산’ 원리 또한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환난에서 받은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로 하여금 동일한 위로를 체험하게 해 준다고 말한다. 즉, 고통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 다른 이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영적 위로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 각 개인이 겪는 시련과 극복 과정이 공동체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그 결과로 교회가 전반적으로 성숙해 가는 그림이 성경적 이상이다. 만약 교회가 약한 지체를 돌보지 않고, 스스로 환난을 겪은 자가 침묵하거나 소외된다면, 그 교회는 중요한 은혜의 채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장재형목사나 다른 사역자들이 간증을 통해 자신의 어려움과 극복을 진솔하게 나누는 이유가, 결국 교회 안에 이러한 ‘위로의 선순환’을 일으키기 위함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열넷째, 고린도후서 마지막(13장)에 바울이 남긴 축복과 권면도 현대 교회가 귀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같은 마음을 품으며 평안할지어다”라고 당부한다. 이는 단지 개인적 덕담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온전함에 이르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서로 나누며, 분열을 극복해 같은 마음을 품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라는 구체적 지침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복음을 점검하고, 거짓을 배제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갈등 상황에서 진리를 지키면서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이런 노력은 결코 쉽지 않으나, 고린도후서가 보여 주는 바울의 희생과 눈물, 그리고 그 결과로 찾아온 교회의 회복 과정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포기할 이유는 없다.

결국 현대 교회의 목회적 과제는 고린도후서 안에 집약된 원리들을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문화적 맥락’에 적용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장재형목사가 보여 준 사역 방향을 대입해 볼 수 있다. 예컨대 국내외 선교 현장에서의 도전은 고린도 지역 교회가 마주했던 도전과 다를 바 없고, 미디어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할 때 마주하는 비난 역시 바울이 헬라인들의 지성을 상대하며 겪었던 혼란과 겹친다. 이처럼 시대와 문명이 달라도, 그 속에 반복되는 본질적 문제는 동일한 패턴을 가진다. 따라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뢰한다”라는 고백이야말로, 늘 반복해서 상기해야 할 불변의 원리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이 원리를 삶으로 구현해 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기도다. 바울이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더욱 강해져서 고린도후서를 집필할 수 있었던 궁극적 이유는, 그의 신학 지식이나 열정만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도 수많은 프로그램과 전략, 재정을 동원할 수 있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금방 소진되고 만다. 고린도후서가 가르쳐 주는 대로, “약함 속에서 강함”이 드러나는 것은 곧 성령께서 행하시는 기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간증하는 내용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이 살아나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을 통해,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맥락을 종합해 볼 때, 고린도후서는 ‘고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히려 교회와 사역을 더 확장시키는’ 역설적인 신앙의 원리를 전달해 주는 귀중한 서신이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까지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복음의 순수성, 교회의 거룩성,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라는 이상은,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모든 현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핵심 가치다. 고린도 교회는 처음에는 분열과 세속화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지만, 결국 바울이 보낸 편지와 권면, 그리고 그의 기도와 희생 덕분에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똑같이 현대 교회도 크고 작은 난관 앞에 흔들릴지라도, 바울의 ‘환난 중 위로’ 원리와 ‘부활 신앙’을 따라간다면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사역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교회 개척, 미디어, 교육,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비판이 있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 자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체험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한 이 진리를 지속적으로 붙들 때,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 속에서 복음이 더 강력하게 증거될 것이다. 결국 고린도후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것이 곧 교회가 환난을 이겨 내고, 거짓 교리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세상에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임을 우리는 믿는다.

요컨대 고린도후서는 결코 1세기 초대교회의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21세기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까닭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 그리고 세상의 유혹은 본질상 여전하고, 그 모든 것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부활의 능력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경험한 문제들을 낯설게만 볼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교훈을 얻어 우리의 현재 교회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한껏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사람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이끈다. 현대 교회도 위기 앞에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복음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도, 바울처럼 “이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실천할 때, 교회는 눈물과 갈등을 넘어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가 지금껏 머리로만 이해하던 ‘부활 신앙’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바울이 보여 준 이 모범이야말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계속해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보편적 원리이다. 이렇게 두드러진 메시지를 붙들고, 오늘도 교회는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십자가 사랑 – 장재형목사

Ⅰ. 십자가의 길과 골고다 언덕에서 나타난 고난의 의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골고다(히브리 말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장면은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구속사적 핵심 사건이다. 요한복음 19장 17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이 비극적이면서도 구속사적 의미가 충만한 장면을 기록한다. 다른 복음서, 특히 마태복음 27장이나 마가복음 15장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매질과 조롱을 당하신 후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주님은 자신이 달리실 십자가를 직접 메고 먼 길을 돌아 골고다에 이르셨다.

십자가형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처형 방식으로 알려져 있었고, 로마 제국은 ‘죄목이 적힌 패’를 죄수의 목에 걸어 긴 거리를 걸어가게 함으로써 공개적 경고와 조롱을 병행하였다. 이는 죄수의 수치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였지만, 동시에 혹여나 죄수를 변호할 이가 나타나면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악명 높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죄목을 뒤집어쓰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이는 주님께서 스스로를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 10:45)로 내어주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걸어가신 골고다의 길을 “인류 구원을 향한 가장 극진한 사랑의 길”이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는 모습은 어떤 고귀함도 남아 있지 않은 수치와 고통의 행진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구속사 완성을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의 행렬이다. 즉, 인류가 감당해야 할 저주와 죄악, 온갖 증오와 분노를 예수님 혼자서 지고 가셨기에, 그것은 세상 눈에는 패배처럼 보이는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승리로 귀결되는 역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골고다 언덕에서 펼쳐진 마지막 순간들 속에서 십자가의 대속이 완전히 구현된다.

주님께서 처형지인 골고다, 곧 해골의 곳으로 불리는 그 언덕에 이르실 때, 군병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형수의 소지품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 19장 23-24절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지니셨던 옷마저 제비를 뽑아 나누는 군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장면을 통하여 “세상의 탐욕과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이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말한다. 군인들은 예수께 남은 마지막 속옷 한 벌까지도 가져가기 위해 서로 다투며 제비를 뽑지만, 예수님은 이미 구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죽음 직전까지 모든 것을 비워내셨다. 빌라도가 붙여놓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罪牌)도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꿔 달라고 항의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못박는다(요 19:21-22). 이는 역사의 역설이자 아이러니이다. 거짓된 유대 지도자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말했지만, 정작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공표해버린다. 겉보기에는 힘없는 패배자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모습이지만, 실은 이 자리가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의 정점이 된다.

이 ‘골고다’는 검고 음습한 분위기, 죽음을 암시하는 해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종종 갈보리(Calvary)라고도 불리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상징인 ‘십자가’가 세워진 땅이다. 그래서 “갈보리”라는 이름을 교회에 붙이는 것은, 죽음과 수치가 지배하는 자리에서조차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능력과 사랑이 빛난다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되새기는 행위이다. 골고다 언덕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어둠과 절망을 뚫고 궁극의 승리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무대이다.

주님은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삭의 운명을 정면으로 알고도 감당하신 더 큰 희생 제물처럼,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을 오르셨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자기가 번제물이 될 줄 모른 채 장작을 짊어지고 모리아 산을 오르지만,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여호와 이레”)으로 그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을 것을 분명히 알고도 자발적 순종으로 끝까지 가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대속(代贖)이다.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서 해방시키듯, 주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을 값으로 치르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한다”고 하신 말씀(막 10:45)은 바로 그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은 오로지 사랑으로 인한 자기희생이며, 결코 세상의 무력이나 억지로 밀려난 죽음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갈 3:13)하시는 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의 고통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채찍질과 조롱, 목마름과 극도의 체력 고갈, 군인들의 조롱, 멸시하는 군중의 시선, 그 사이에 철저히 홀로 남으신 영적 고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예수를 짓눌렀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예수님이 지치고 쇠약해져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고만 매우 간결하게 서술한다(요 19:17). 장재형목사는 이 단 한 줄에 담긴 의미를 “사도 요한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슬프고도 거룩한 비극의 순간이기에, 차마 세부 묘사를 길게 늘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라 풀이한다.

결국 이 비극적 고통은 궁극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된 사건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자기 의(義)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이처럼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처형은 역사의 한 지점에서 일어난 하나의 잔혹한 사형이 아니라, 장재형목사가 말하듯이 “온 인류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우주적이고 영적인 대사건”이다.

Ⅱ. 십자가 아래 함께했던 사람들: 구레네 사람 시몬, 여인들, 그리고 제자 요한

요한복음 19장 17-27절을 읽다 보면, 십자가 아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먼저는 로마 군병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주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지려 제비 뽑기에 여념이 없다. 시편 22편 18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탐욕과 무정함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죄수 중 한 명에 불과했고, 처형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던 것이다. 속옷마저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요 19:23)이라 하여 찢지 않고 통째로 가지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신음을 곁에서 듣고도, 그 고통과 비극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반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외부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였다가, 로마 군병들에게 지목을 받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 대신 지게 된다(마 27:32, 막 15:21). 그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에 속한 지명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시몬이었다. 그는 원치 않게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해야 했지만, 그 일로 인해 그의 일가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아들 루포 등은 나중에 복음 공동체의 중요한 인물로까지 소개된다(롬 16:13).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게 되었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적 사건”이라 설명한다. 한 인간이 예수의 십자가를 잠시나마 지고 간다는 것 자체가 불행처럼 보였으나, 그 깊은 고난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시몬과 그 가족은 주님을 구주로 만나게 된다. 결국 억지가 자발적 헌신으로, 고난이 영적 축복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장 눈여겨볼 사람들은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던 여인들과 사랑의 제자 요한이다. 요한복음 19장 25절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다.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이모(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전해지는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이 네 여인이 마지막까지 주님의 죽음의 현장에 함께하였다. 십자가형은 당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가해지는 최대의 형벌이었고, 그 형장 주변에 서성이는 이들은 연루자로 의심을 받거나 함께 수치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도 이 여인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고난주간 찬송(흑인 영가)을 떠올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현장에 누가 남았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제자들 중 대부분은 두려움으로 흩어져 숨거나 달아나 버렸다. 베드로는 심문 현장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 또한 목숨의 위험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인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만큼은 십자가 아래에 섰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진정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는 말씀(요일 4:18)을 떠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안전이나 체면보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향해 하신 말씀이 매우 인상적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며,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사형 직전에, 극심한 고통에 짓눌려 숨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돌보려 하시며 제자에게 맡기신다. 이는 부모 공경과 효(孝)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간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마리아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한평생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의 길’을 걸어오시느라 평범한 아들로서 마리아 곁에 머물 수 없었던 주님의 삶을 집약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야 그분은 마치 “이제야 어머니에게 아들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뉘앙스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공생애를 사는 동안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셨으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자(母子) 관계를 완성하시는 사랑을 끝까지 잊지 않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십자가 아래에는 군병이라는 잔인함과 탐욕의 형상이 있는가 하면, 시몬과 같은 우연한 동참자의 감동이 있으며, 여인들과 요한 같은 진실한 추종자의 사랑과 헌신이 있다. 이 다양한 군상이 어우러진 현장에서,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삶의 거울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는 우리의 본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 본성을 넘어서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군인들처럼 남의 것을 빼앗거나,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예수를 배척하는 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그 의미를 깨달아 변혁되는 길, 혹은 여인들과 요한처럼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며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가능하다.

Ⅲ. 속죄의 완성과 교회의 도전: 십자가 사랑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관점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며,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놓은 대속의 결정적 장면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스스로 짊어지셨고, 그로 인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는 율법(신 21:23; 갈 3:13)을 온몸으로 받으셨다. 이처럼 스스로 속죄양이 되심으로 인간의 죄악을 전부 뒤집어쓰신 주님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의식’에 등장하는 염소(스케이프고트)보다 훨씬 더 완전한 희생으로, 홀로 광야가 아닌 십자가 형장에까지 가셨다. 이사회가(四野)에서 들짐승에게 찢겨 죽는 염소보다 더 가혹한 고통을 실제로 감내하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되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십자가 대속 사상을 해석하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받았어야 할 모든 형벌을 주님께서 혼자 담당하신 것”이라고 정리한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죄사함과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이미지와 연결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는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때 주님은 원수조차도 사랑하시어(마 5:44) 모든 미움과 증오를 자신의 육체로 흡수하셨고, 심지어 자신에게 침 뱉고 때리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를 호소하신다(눅 23:34).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삶으로 증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순히 역사의 한 사건을 넘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지속적인 도전이 된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사셨는가’를 묵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십자가를 바라본다’ 함은 곧, 주님이 감당하셨던 고난의 의미와 사랑의 크기를 되새기고, 우리 삶에서 동일한 사랑의 길을 걷겠노라 결단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십자가는 단순한 구원의 표지판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상징이자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함을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역설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고(눅 23:34),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으며(롬 5:8),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교회가 이 진리를 붙든다면, 세상에 맞서 고통받는 이들을 섬기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현실적으로 매우 무거운 부담이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지게 되는 짐이 있고, 그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만나게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구레네 시몬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음에도, 결국 그 행위를 통해 그는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때로 우리의 헌신은 기쁨이 아닌 의무감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큰 은혜와 구원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억지의 짐이 복된 ‘자발성’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펼쳐진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 곧 어머니를 부탁하는 장면(요 19:26-27)은 우리에게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사랑”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몰두해온 예수님이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어머니를 버려두지 않으신다. 교회가 세상 구원의 사명을 외칠지라도, 가까이에서 돌봐야 하는 존재들—연약한 이웃, 교우, 가족—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공적인 사역과 개인적인 사랑이 조화를 이룰 때, 십자가 사랑은 더욱 온전해진다”고 해석한다. 교회가 선교와 봉사에 힘쓰는 중에도, 당장 곁에서 상처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실천적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속옷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는 사실(요 19:23)은 대제사장적 의미를 상기시킨다. 구약의 제사장 복장은 솔기 없이 짜여진 옷으로 상징되는 거룩과 완전함을 나타내는데, 예수님은 참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전부를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 죄인의 중보자가 되셨다(히 7:26-27). 세상은 끝내 그 옷마저 빼앗아가려 제비 뽑기에 열중했지만,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비우신(kenosis) 상태”로 걸어가셨다. 이 사실을 교회가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에게 있는 조금의 소유와 재물, 자아를 붙들고 탐욕하는 모습이 과연 십자가 아래에서 설 자리가 있는가”를 질문한다.

결국 십자가 신앙이란 “내가 얻고자 함”이 아니라 “내가 내어줌”에 초점이 맞춰진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신”(눅 19:10) 것처럼, 교회 역시 끊임없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고 하셨으며,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명령하셨다. 십자가는 그 사랑을 극한까지 실천한 현장이자, 예수님이 설파하신 ‘원수 사랑’(마 5:44)의 구체적 실현 장소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종종 십자가를 장식적으로만 붙들고, 실제로는 세상 군병들처럼 그리스도의 유산을 차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많다면, 이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성과 탐욕이 만천하에 폭로됨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그런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회개와 결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고, 그 길에는 반드시 자기 부정(否定)과 이웃을 향한 섬김이 따른다. 바로 이때, 십자가가 교회 공동체와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단지 과거의 상징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존재와 실천을 규정하는 생생한 ‘능력’으로 작동한다.

십자가의 사건, 즉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전개된 이 이야기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자명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도, 소망도, 영생도 없다는 것이다. 골고다 언덕에서 흘린 예수님의 보혈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속의 은혜를 이 땅에 선물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남기신 교훈은 사랑,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이다. 교회는 십자가를 높이 들되, 그 의미를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를 붙드는 것은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지겠다는 것이며, 세상의 군병처럼 내 유익만을 찾지 않고, 구레네 시몬처럼 때론 억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짐을 지며, 주님의 어머니와 그를 사랑한 여인들처럼 끝까지 동행하겠다는 사랑의 결단”이라고 한다.

이처럼 십자가 신앙은 고통과 사랑, 죽음과 생명이라는 극적인 모순과 역설 속에서 완성된다. 겉으로는 수치와 파멸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부활의 영광과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 교회는 이 부활의 소망을 품고 세상의 골고다와 같은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리에서 진정한 구주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 이 지점에서 신학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십자가가 있고, 그것을 기꺼이 지겠다는 헌신의 자세를 가질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속의 길이 비로소 우리의 삶에서 열매 맺는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십자가를 자신에게 유익한 상징이나 세속적 도구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속옷까지 가져가려는 로마 군병의 모습은, 혹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물욕, 명예욕, 권력욕의 본질을 폭로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이 지니셨던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도,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남에게 무엇을 더 줄 수 있는지 고민하셨다. 어머니를 돌보아달라고 당부하신 것만 봐도,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이 자기 비움과 섬김의 사랑이 십자가 정신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교회가 이 같은 사랑을 추구한다면,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갈 6:14)고 한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야말로 골고다 언덕에서부터 이어지는 생명의 길을 세상에 전하며,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짐을 지고 참여하는 이들을 하늘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비록 고난은 깊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확신이 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자, 요한복음 19장 17-27절이 선포하는 메시지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간다는 것”은 치열한 고난과 희생을 동반하지만, 그 끝에는 참된 자유와 구원이 기다린다. 잔혹한 십자가의 형벌도,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사랑을 이길 수 없었다. 교회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모든 탐욕과 미움, 분열과 무정함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자기 희생의 사랑, 죄인을 용납하시는 긍휼, 그리고 부활 생명의 약속은 지금도 세상을 새롭게 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안다면, 그 길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책임이 있다”고 역설한다. 십자가는 단지 회상(回想)의 대상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실천되어야 할 사랑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실천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세상을 향해 구원의 빛을 비추는 길이 된다. 교회가 끝끝내 이 길에서 떠나지 않고 주님을 좇아 걸어갈 때, 골고다의 암울함은 부활의 빛으로 환히 밝아지고,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증언할 것이다.